청대 만주족의 宗族 형성에 대한 小考—漢化論에 대한 비판적 검토

만주족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조를 건립한 민족으로 약 300년간 중국을 통치하였다. 현재 중국의 영토와 다민족 사회는 청나라의 유산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대중들이 중국의 전통복장으로 떠올리는 치파오(旗袍)는 한족의 전통복장이 아닌 만주족의 전통복장이다. 이처럼 만주족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만주족의 성공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여전히 한족중심적인 견해가 농후하다. 대표적으로 원과 달리 청조가 성공적으로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 만주족이 명의 제도와 문화를 계승하고 한화(漢化)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청이 명의 제도와 유산을 계승한 측면이 있지만, 팔기, 이번원, 군기처 등 청조만의 특수한 제도도 많이 볼 수 있다. 어쩌면 서방 학계에서 신청사로 불리는 학자들이 강조한 청조의 내륙아시아 정체성과 만주 정체성 문제는 중국은 물론 국내 학계에 만주족 본연의 모습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2)
문화는 일방적인 수용이 될 수 없고 상호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한화(漢化)라는 일방적인 표현은 지양해야 한다. 더욱이 정체성 문제는 쉽게 변할 수 있는 표면적 모습으로만 결론지을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더욱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중국학계에서 만주족의 한화를 주장하는 이유는 만주족이 한문과 한어를 사용하고 한족들의 문화를 수용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교를 중시하고 유가적 가족제도인 종족(宗族) 문화가 만주족 사회에도 전파된 것도 중요한 근거로 들고 있다.
종족(宗族)은 현대사회에서 비교적 생소해진 개념이지만, 명청 시대 대표적인 기층사회 조직으로 부계 혈연관계를 매개로 한 조직화된 혈연집단을 의미한다. 만주족 사회에서 宗族의 형성을 한화(漢化)의 근거로 소개하는 이유는 한인 종족과 같은 족산(族產)의 형성, 족규(族規) 수립, 족보 편찬 등 한인과 유사한 종족 형성의 표상(表象)을 보이기 때문이다.3)그러나 청대 한인(漢人)들이 변발을 하고 치파오(旗袍)를 입었다고 하여 정체성을 잃었다고 보지 않는 것처럼, 표면적 모습만으로 만주족의 종족(宗族) 형성을 한화(漢化)의 결과로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만주족 사회를 논함에 있어서 반드시 함께 연결되는 대상은 팔기(八旗)이다. 팔기는 청대 병민일체 조직으로 모든 만주인은 팔기에 소속된 기인(旗人)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팔기는 만주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자 만주족의 신분과 지위를 보호하는 제도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선행연구에서 만주사회의 기층조직인 종족(宗族)을 논함에 있어서 팔기와의 연관성을 찾아보는 시도는 찾기 어렵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종족(宗族) 형성을 한화의 결과로만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팔기제도의 연관성 속에 나타난 만주족 종족(宗族)의 특수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 <청대 팔기(八旗)의 구성 출처: 百度百科>
누르하치가 팔기를 조직하기 이전 여진족4)사회는 지연(地緣)을 기반으로 조직된 촌락 집단으로 구성되었고 이를 만주어로 가샨(gašan)이라 하였다. 가샨에는 단일 혹은 복수의 혈연 집단인 무쿤(mukūn)이 존재하였다. 누르하치가 여진 사회를 통합하면서 가샨은 팔기의 하부조직인 니루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니루의 수장인 좌령은 기존 가샨의 수장(gašan i da, 村長)이 니루의 좌령직을 맡아 세습하였다. 그리고 가샨의 수장과 함께 투항한 다수의 혈연집단은 점차 분화되어 직계혈족을 중심으로 하는 종족(宗族)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1.조영(祖塋) 및 사당(祠堂) 건립의 특징
종족(宗族)이 형성되고 그 조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내부 혈연관계를 강화시키는 의식으로 제사가 중요하였다. 또한 제사는 그 본연의 기능과 더불어 제사를 계기로 흩어진 족인이 모여 현안을 논의하고 처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종족(宗族)의 형성은 필연적으로 조영(祖塋) 혹은 사당(祠堂)과 같은 의식적 장소의 건립이 뒤따르게 된다.
본래 화장을 주로 하던 만주족의 매장문화는 한인 종족(宗族) 문화의 영향과 청 조정의 화장 금지 조치에 따라 조영(祖塋) 문화가 확산되었다. 만주족의 조영은 팔기의 규정으로 한인과 달리 현 거주지가 아닌, 동북지역이나 북경에 집중 조성되었다. 이는 입관 후 팔기주방(八旗駐防)으로 파견된 기인들의 토착화를 방지하기 위해 시행된 귀기제도(歸旗制度)의 영향이 작용한 결과였다. 건륭 연간 귀기제도는 폐지되었지만, 만주족은 여전히 동북지역이나 북경 인근에 조영(祖塋)을 건립하여 한인과 다른 조영 문화가 만들어졌다.
다음으로 사당의 장소는 대체로 가내(家內) 사당, 조영 내 사당 그리고 성 내 사당으로 구분된다. 가내 사당은 만주족이 서쪽을 숭상하는 풍습에 따라 방의 서쪽 벽에 제단을 만들어 조상들의 위패를 모셨다. 조영지에 건립된 사당은 조영지가 주로 성 밖에 있어 제사 준비 및 족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성 내에 건립한 사당은 만주족의 주요 집산지인 북경에 건립하였다. 성내 사당은 주로 여러 지파의 공동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2.족보 편찬과 활용
족보가 한문화(漢文化)에서 기원하였지만,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의 족보가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닌 것처럼 청대 만주족의 족보도 자체적인 특수성이 존재하였다. 만주사회에는 동시대 한인과 달리 국가 주도의 관방(官方) 족보가 편찬되었다. 관방 족보는 만주사회에 일방적으로 전파된 것이 아닌 상호 영향을 주며 확산 및 발전하였다. 청조 통치자가 외래문화인 족보를 만주사회에 확산시킨 이유는 족보가 만주사회를 유지하는 데 실용적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조는 관방 족보를 활용해 신원이 불분명한 기인에 대한 검증 자료로 활용하였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갈등이 발생할 여지가 있는 세직 세습에서 관방 족보를 이용해 세습 후보자의 적합성 여부를 판별하였다. 또한 만주족 족보에는 외형적으로도 한인과 다른 형태의 족보가 편찬되었다. 대표적으로 만한합벽(滿漢合璧) 형태의 족보이다. 만한합벽(滿漢合璧)은 만문(滿文)과 한문(漢文)이 대칭되도록 작성한 것을 의미한다. 한 장의 종이에 두 가지 문자를 서로 대칭되게 작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한문(漢文)은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작성하지만, 만문(滿文)은 이와 반대인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작성하기 때문이었다.
아래 『寧古塔地方正黃旗管下陳滿洲傅查氏全戶敬修之宗譜系』는 중화민국시기에 증수된 것이지만 청대 만주사회의 족보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먼저 본 족보는 청대 만주족 족보에서 자주 보이는 세계표만 기록한 보단(譜單) 형태의 족보이다. 다음으로 족보를 기록한 문자는 약 30미터에 달하는 긴 종이에 만한합벽(滿漢合璧)으로 작성하였다.만문과 한문의 작성 방식에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는 한문을, 왼쪽에서 오른쪽은 만문을 작성해 가운데에서 만나는 형태로 완성하였다.
  • 『寧古塔地方正黃旗管下陳滿洲傅查氏全戶敬修之宗譜系』 5)
3.족장의 선발과 권한
만주족 종족(宗族)의 수장인 족장은 황제의 유지 혹은 훈령을 족인을 관리 감독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따라서 족장은 족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명시하였다. “족장의 통제를 어길 경우 종족 회의를 통해 처벌한다. 양자를 받을 경우 족장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구해야 한다. 집안의 경조사는 반드시 족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족규에 족장의 권한을 명시한 것은 만주족 종족(宗族)에 나타난 특징으로 그 이유는 죄를 지은 당사자를 제외하고 족장이 가장 큰 책임과 처벌을 받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한인 족장은 종족(宗族) 회의를 통해 자체적으로 선발하였고 대부분 퇴직자나 연장자가 맡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만주족 족장은 청조의 규정에 따라 종족(宗族) 내 연장자가 아닌 관직 경험이 있는 자를 우선시 하였다. 이는 만주족 족장이 단순히 한 집안의 수장이 아닌, 팔기의 각종 사무(事務)를 처리하는 실무자였기 때문이다. 가령 족장은 족인의 팔기 호적 등재 및 신분보증, 세직족보의 작성 및 보고, 팔기의 전량(錢糧) 관리, 기지(旗地) 매매 관리, 경조사 보조금 지급 관리, 수녀 선발인원 관리 등의 임무를 맡았다. 족장이 팔기에서 맡은 공적인 임무는 족인이 팔기에서 얻을 수 있는 각종 경제적 혜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즉 청조가 족장에게 맡긴 각종 임무는 족장이 족인의 경제권을 장악해 족인의 일상생활을 관리할 수 있는 실질적 힘을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만주족의 종족(宗族) 형성은 표면적으로 한인 종족과 유사한 종족 형성의 표상을 보이지만, 동시에 한인과 다른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만주족의 종족(宗族) 형성과 발전 과정은 한화(漢化) 혹은 만주족의 독자성만을 강조하는 주장에서 간과한 만·한(滿·漢) 공존과 문화융합의 측면을 보여준다.

한경대학교 백두산연구센터 연구원 김준영

    참고문헌

  • 1) 한경대학교 백두산연구센터 연구원
  • 2) 徐泓, 「“新清史”論爭:從何炳棣、羅友枝論戰說起」, 『首都師範大學學報』1,2016; 김선민, 「만주제국인가 청 제국인가」, 『사총』74집, 2011
  • 3) 高丙中, 「東北駐屯滿族的血緣組織—從氏族到家族再到家戶的演變」 (『滿族研究』1, 1996), p.20; 謝肇華, 「從一份“家訓”看清後期滿族的族長制」 (『滿族研究』1, 1993), pp.43~45; 何海龍, 「清代滿族民間宗法制度基本形態淺析」 (『滿族研究』4, 2002)
  • 4) 여진족은 12세기 금나라를 건국한 민족을 지칭한다. 금 멸망 후 지금의 동북 3성 지역에 거주한 민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1635년 청의 2대 황제 홍타이지가 내부적으로 사용되던 만주(滿洲)라는 종족(種族) 명칭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면서 기존의 여진 대신 만주가 대표적인 종족(種族)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 5)『寧古塔地方正黃旗管下陳滿洲傅查氏全戶敬修之宗譜系』는 필자가 黑龍江省 海林市 楊林村에 거주하는 寧古塔 富察氏 족장의 집을 방문하여 수집한 자료이다. 족장의 집 앞에는 시조 戴先과 시천조 卡特瑚의 묘비석이 함께 세워져있다.
    참고문헌

  • 高丙中, 「東北駐屯滿族的血緣組織—從氏族到家族再到家戶的演變」, 『滿族研究』1, 1996
  • 김선민, 「만주제국인가 청 제국인가」, 『사총』74집, 2011
  • 김준영, 「清 中期 滿洲人의 일상 속 族長의 역할」, 『明清史研究』55, 2021
  • 김준영, 「清 中期 만주족장의 니루(牛錄)관리」, 『만주연구』31, 2021
  • 김준영, 「17세기 이래 만주인의 宗族 형성과 宗族 활동-백두산 권역 만주 宗族을 중심으로」, 『중국사연구』139, 2022
  • 謝肇華, 「從一份“家訓”看清後期滿族的族長制」, 『滿族研究』1, 1993
  • 徐泓, 「“新清史”論爭:從何炳棣、羅友枝論戰說起」, 『首都師範大學學報』1,2016
  • 何海龍, 「清代滿族民間宗法制度基本形態淺析」, 『滿族研究』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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