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헌정민주주의를 위하여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G. W. F. 헤겔, [법철학])

이 말에서 전자를 강조하느냐, 후자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입장이 달라진다. 주로 진보적 입장에서는 전자를 강조하기 마련이고, 보수적 입장에서는 후자를 강조하기 마련이다. 의미가 잘 통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같은 의미이니 ‘이성적인 것’을 ‘합리적인 것’이라고 바꿔 읽어보자. “합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이다.” 이렇게 바꾸면 저 문장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를 동아시아의 현실 해석에 적용해보면, 전자는 동아시아의 지금 상황이 그리 합리적이지 못하니, 합리적인 수준으로 동아시아의 상황을 변화시키고 개선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후자는 동아시아의 지금이 가장 합리적인 상황이므로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진보든 보수든 후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을 테다. 진보가 보기에 동아시아의 현실은 지극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으로 보일 테고, 보수가 보기에 동아시아의 현실은 너무 개방적이라 퇴폐적이고 위험해 보일 테니까. 그렇다면 진보든 보수든 동아시의 지금 현실에 만족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왜 하필 동아시아인가? 물론 현재 지구적 헌정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학자들이 꽤 많긴 하다. “왜 동아시아인가?”라는 질문에 바로 대답하기 전에 지구적 헌정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간단히 설명하는 것이 더 좋겠다. 이들 중 대부분은 현대인의 일상이 이미 한 국가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즉 지구적 왕래와 교류가 빈번해진 상황에서 국가 중심적 사고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지구적 문제가 생겼고, 새로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지구단위의 정치공동체 구성이 필요해진 것이다. 난민문제, 환경문제, 이민문제, 노동문제, 인종문제, 경제문제, 종교문제 등. 심지어 한 나라 안에서도 문화적 다양성이 주목되고 있고, 지구적 관점으로 보지 않으면 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문화 다양성의 몰이해는 향후 차별과 혐오로 확대될 수 있어서 막대한 비용을 치러도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다. 국가 내부적 현실 역시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해결책은 국가 중심적 현실을 강화하면서 새롭게 일어난 변화를 소거해버리든가, 국가 중심적 현실을 탈피하면서 새롭게 일어난 변화를 수용하고 이 변화가 정박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을 창출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진보에게나 보수에게나 지금의 국가적 현실은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으니, 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더 개방하거나, 더 폐쇄하거나, 두 입장을 합리적 수준에서 절충하거나)는 요구만큼은 각자의 시각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듯하다.
여기서 관건은 국가 중심적 현실을 강화하려는 대안에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현실은 초국가적 왕래와 교류로 인해 국경의 개념이 느슨해져 있고, 앞으로 그런 상황이 더 진행될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국경 개념을 더 강화한다는 것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익의 문제를 위해서도 도움이 될 수 없으며, 도덕적인 측면에서도 국경을 강화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현실적으로도 이상적으로도 국가 중심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국가의 붕괴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국가주의적’ 사고는 허용될 수 있지만, 국가 ‘중심적’ 사고는 문제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국가 중심적 사고를 넘어서 이렇게 삐걱거리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대안은 적어도 정치적이고 경제적 현실성의 문제를 가늠하기는 어려워도 도덕적 정당성만은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도덕적 정당성으로 새로운 정치-경제적 현실성을 견인할 수는 있다. 인권의 문제를 예로 들자면, 한국에서는 헌법을 능가하는 수준의 대의를 가진 인권조례가 있다. 예컨대 안산시의 인권조례 같은 경우 안산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산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시민의 개념을 ‘국민’으로 한정시킨 것이 아니다. 이는 국민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헌법의 범주를 넘어선 것으로서, 인권적 측면에서는 헌법을 초월하는 대의를 가진 조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조례를 가진 도시들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이런 도시들이 서로 연대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렇게 된다면 환경, 정치, 경제문제 등으로 인해 발생한 난민들은 특정 국가에서 추방이 되더라도, 인권조례가 있는 다른 국가의 연대 도시로 갈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의 삶과 생명이 실질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상상력’은 UN(united nation)이 아닌 UC(united city)라는 개념을 창출했다. UC는 일종의 인권 자매도시와 같은 형태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인권조례를 통과시킨 도시끼리 자매도시로 연대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헌법보다는 조례가 도시민에게 좀 더 현실성이 있기에 이런 식의 상상력을 실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인권의 문제는 국가 중심적 사고에서는 이미 한계를 갖고 있다. 국가의 법이 미치지 못하는 모든 영역에서 인권유린 사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UN이나 UC에도 문제는 많다. 이미 국제법은 지금 일어나는 지구적 인권유린의 상황에 그 어떤 해답도 내지 못하고 있으며, UC는 아직 상상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해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도시는 한 국가의 법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추방될 사람이 인권조례가 통과된 다른 자매도시로 보내지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므로 인권을 보장하자는 대의에 국가든, UN이든, UC든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한계로 인해 생기는 갈등으로 치러야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비용도 상당하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극단적 상상력이 바로 지구적 헌정 공화국을 만들자는 이념이다. 인권의 사각지대를 없앰으로써 인권을 직접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지구적 정치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 정당성을 갖는 것을 넘어서 현재의 지구적 문제로 인해 국가 내부에 생길 수 있는 막대한 비용 지출을 줄일 수 있는 대안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한 즉각적 반발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지구적 헌정체제가 과연 실현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UN과 같은 기구, 그리고 국제법 같은 게 있지만, 이것이 실제 강제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이라크를 향해 공격을 감행했고, UN은 이를 막았지만, 미국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실제적 권력과 제재력을 갖지 못한 기구와 법은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그 실재성(사실성)을 담보하지 못하며, 우리는 그러한 법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법은 실제적 효력을 가지는 ‘사실성’과 도덕적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 하버마스는 [사실성과 타당성]에서 이러한 법의 특징에 대해 논한 바 있다.
지구적 헌법을 지구 공론장을 활용한 민주적 참여를 통해 제정한다면, 그 법은 공론장의 논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공공성과 정당성을 획득할 것이며 정당성을 획득한 법은 실제적 효력을 발휘하기 위한 권력 담지자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지구적 공화국을 민주적 헌정체제와 연계시키려하는 것은 지구적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한 절차로서 민주주의적 절차를 요구하며, 여기서 만들어진 지구적 헌법은 공정한 절차를 통하여 정당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힘을 행사한다면, 강제성과 실효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인권문제 하나의 예만 들어도, 이 문제는 지구적 공화국의 민주적 헌정체제가 아니면 쉽게 해결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민주적 헌정체제가 굳이 필요할까?
  • 사진출처: 촛불 밝힌 세계인권선언 60년, 2008년 12월 10일 동아일보
1948년 세계 인권선언이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은 전 지구시민이 48년의 인권 선언의 내용과 절차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48년 인권 선언은 다분히 미국 주도 하에 진행되었고, 다수의 반미국가, 즉 동구권에 의해 지나치게 자유주의적 조항이 많이 담겨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뿐만 아니라 중동의 이슬람 세력 역시 48년 인권 선언에 동의하지 않았고, 급기야 1990년 중동의 이슬람 세력들만 따로 카이로 인권선언을 했다. 이는 인권이 갖는 보편적인 내용과 인권이 갖는 특수한 내용 사이의 모순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인권 문제의 특수성이 배제된다면, 인권은 특정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시도를 스스로 내팽개치는 셈이 된다. 이 둘 사이의 갈등을 통해서도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인권문제가 개인의 특수성을 반영하면서도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동시에 보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여성이 나는 무슬림이므로 히잡을 쓰고 학교에 등교하겠다고 한다면, 이는 허용되어야 할 종교의 자유일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학교에서 특정 종교를 포교하는 활동이므로 금지해야 할 일일까? 다들 일요일에 놀지만, 내가 속한 종교는 토요일을 휴일로 지정하고 있으므로 일요일에 일하고 싶은데 강제로 쉬어야 한다면 내 권리는 보장받을 수 있을까? 나는 양심상 총을 들지도 않고 군대에 입대하고 싶지도 않은데, 내 권리는 보장받을 수 있을까? 이런 상황들은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 권리를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자(보편), 자신이 속한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반영한 권리 보장 요구를 하는 것이며(특수), 자신의 개인적 신념과 생활을 반영한 권리 보장요구를 하는 것이다.(개별) 인권보장을 요구할 때는 이렇듯 보편성과 집단적 특수성 그리고 개인의 개별성이 모두 고려될 수밖에 없다.
48년 인권선언이 지나치게 자유주의적 입장이 반영된 것이며, 기독교적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 반대한다면, 48년 인권 선언은 또한 아시아적 상황을 지나치게 누락시킨 채 관철된 것은 아닐까? 그 가운데 아시아는 불교문화권과 유교문화권 그리고 한자 문화권이라는 공동의 집단 정체성을 형성한 곳이다. 그리고 서구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와는 다른 공동체주의적 입장을 중시하는 정체성 역시 갖고 있다. 물론 이런 문화는 동아시아적인 여성차별이라는 공통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보편적으로는 지구적 여성차별 문제의 동아시아 버전이기도 하다. 아무튼 48년 인권선언에는 동아시아적 특수성이 반영되지 않았으므로,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이를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인권선언은 48년 선언으로 완료된 것이 아니다. 여전히 지구적 시민의 다양한 비판에 노출되면서 자신의 공적 가치를 다듬어나가는 중이다. 여기에 한 개인의 개별적 특성으로서의 인권, 한 개인이 집단 정체성(국가, 문화, 종교, 경제 등)을 해석하고 수용한 특성으로서의 인권, 그리고 보편적으로 인정되어야 할 인권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동아시아적 특성이 반영된 인권 보장을 요구하면서, 이를 인권의 내용을 개선하는 데 반영해야할 필요도 있다. 물론 동아시아에도 동아시아적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소수성도 다수 존재하며 이 소수성 역시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인권선언이 지속적으로 다시 쓰여야하는 이유다.
인권은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법적 실효성을 가져야 보장의 강제력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권은 도덕적인 것만으로도 또는 법적인 것만으로도 머물 수 없다. 이러한 두 접점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바로 헌법이다. 그렇다면 헌법이 인권을 보장하는 정당성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실효성을 가져야 하는데, 이러한 법은 민주적 공론의 절차를 거쳐 그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당한 법은 정당하지 않은 현실을 견인할 수 있는 비판적 시금석이 된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 헌정 민주주의는 헌법이 가지는 사실성과 타당성을 확보함으로써 동아시아의 부당한 현실을 이성적(합리적)으로 견인할 수 있으며, 초국가적 정체성을 요구하는 보편주의적 현실에 적응과 대응을 하면서, 아시아적 정체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그 정체성을 지구적 인권 또는 지구적 헌법의 내용에 포함시킬 수 있다. 물론 아시아적 정체성이 아시아에 속한 또 다른 소수성, 즉 아시아적 정체성에 포함되지 않거나 미처 반영되지 못한 소수성과 지속적으로 화해를 추구하면서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이렇게 생산된 동아시아적 헌정 민주주의는 자기들만의 헌정체계를 준비하고 있는 EU와도 생산적 긴장관계를 산출할 수 있을 것이고, 아프리카와 중남미 공동체를 구상하는 다른 지역과도 생산적 긴장관계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지구적 시민에게도 여전히 (데리다와 레비나스적) 환대의 제스처로 자신의 공공성과 인권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와 여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 환대의 제스처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기존의 인권과 헌정은 반드시 갱신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기존의 공공성에 임계가 발생한다는 말이다(임계적 공공성).
따라서 동아시아 헌정 민주주의를 구상하는 것은 지구적 인권문제를 보장하는 헌정체제를 위한 생산적 자극이 될 것이고, 동아시아 고유의 문화적 특수성과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정체성 확립의 시도가 될 것이며, 동아시아 내부에 동아시아의 정체성에 속하지 않는 개별 정체성을 보장 및 보호함과 동시에, 이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박탈된 개인의 특수한 인권(개별)을 보호하기 위한 도시 및 국가적 헌정(특수1), 동아시아적 헌정(특수2), 그리고 지구적 헌정(보편)이라는 개별-특수-보편의 변증법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헌정체제는 이 모든 과정을 완성하기 위한 중요한 매개점이라 할 수 있으며, 지구적 시민 되기 또는 지구적 입법자가 되기 위한 생산적인 실험장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구적 문제로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갈등과 비용을 합리적으로 개설시킬 수 있는 대안도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동아시아 시민사회 간의 연대(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동아시아 도시 간 연대(이것도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이 연대가 국가 간 연대를 통해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이 공동체가 공동의 헌정체제를 갖추기를 바란다. 동아시아 헌정체제는 동아시아 전체와 거기에 속한 국가 및 그 속에 포함된 또는 포함되지 못한 개인들의 현실적인 삶을 더욱 이성적인 삶으로 고양하는 정당하고도 효력 있는 실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현실을 견인하는 상상력의 중력을 믿는다.
“이성적인 동아시아 헌정민주주의가 바로 현실적인 동아시아 헌정민주주의며,
이성적인 지구적 헌정민주주의가 현실적인 지구적 헌정민주주의다.”

민주시민교육원 나락한알 부원장, 사회철학 박사 김동규1)

  • 1) 민주시민교육원 나락한알 부원장, 사회철학 박사, 부산대와 인제대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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