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왜 공생(共生)을 말하는가

  • 1. 중국 연행(燕行) 25년간의 경험 2. 중국은 한국과 동행(同行)하는 이웃 3. 미중 사이에 놓인 한국을 향한 제언
중국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미중 사이에서 한국의 선택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마치 ‘당신은 부모님 두 분 중에 누구의 편입니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우문(愚问)이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미중관계 속 한국의 진퇴유곡(进退维谷)은 수년 전부터 국제관계 연구진들 사이에서 언급되어왔던 주제다.1) 그러나 이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을 찾기 어려웠고, 한국의 모호한 태도가 결국 중국의 화를 불러일으켜 사드(THAAD) 갈등까지 치닫게 했다. 어쩌면 중국의 이 같은 반응은 국력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인지도 모르겠다. 과거 도광양회(韬光养晦)를 말하던 중국이 이제는 유소작위(有所作为)를 강조하며 국제사회에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기 때문이다.2) 다만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한국은 앞으로도 세계 두 강국인 미중과 함께 해야 하며, 이들 사이에서 한국의 불편한 심리전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공간을 통해 중국에 대한 나의 생각을 지난 25년 동안 경험한 북경생활을 바탕으로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이 오늘날 한국에게 어떤 의미인지 고찰해보겠다. 마지막으로 미중관계 속 한국의 선택을 묻는 질문에 접근함으로써, 중국에서 수학 중인 한국유학생의 관점으로 제언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우문에 대한 현답(贤答)을 찾는데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길 바란다.
1. 중국 연행(燕行) 25년간의 경험3)
(1) 1990년대 초, 광활한 대륙만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나라

한중수교 바로 다음 해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처음 중국 땅을 밟은 곳은 북경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북경으로 가는 항공노선은 김포-천진이 유일했는데, 북경 도심으로 가려면 외곽에 있는 천진 공항에서 차로 한 번 더 갈아타야 했다. 지금은 천진에서 북경까지 고속열차로 30분이면 이동할 수 있지만, 그때는 식빵처럼 생긴 노란색 택시를 타고 두 어 시간 동안 허허벌판을 달렸다.
방학에는 가족과 함께 중국의 각 성(省)을 여행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북경에서 운남성 곤명(云南省·昆明)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의 일이다. 침대칸에서 몇 박째 투숙하며 남쪽을 향해 달리는데 하룻밤이 지날 때마다 나는 겨울 외투부터 여름 반팔 티셔츠까지 옷을 한 벌 한 벌 벗어야만 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이 거꾸로 가는 듯 그저께는 겨울, 어제는 가을, 오늘은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 중국의 모습이 광활하다고 기억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당시 북경거리가 내게 심어준 깊은 인상 때문이다. 내가 다녔던 유치원과 학교는 명문대와 연구소가 모여있는 중관촌(中关村)에 있었는데 나는 그곳을 매일 수레가 달린 삼륜차 뒷좌석에 앉아 등하교했다. 건물은 페인트가 칠해지지 않은 무채색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도시 전체가 온통 회색 잿빛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천안문광장만큼은 예외였다. 붉은 페인트칠로 뒤덮인 천안문 한가운데에는 마오쩌둥(毛泽东) 얼굴이 그려진 액자가 걸려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오성홍기가 펄럭거렸다. 더욱이 겨울에는 시베리아에서나 볼 법한 진녹색의 두툼한 솜옷을 입은 사람들이 공산당의 상징인 빨간 별을 단 검은 털모자를 쓰고 거리에 즐비해 있어 사회주의 국가에 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다.
  • ※사진: 바이두(www.baidu.com) 검색
(2) 2000년대 초, 또 다른 코리아를 만날 수 있는 곳

몇 년 만에 다시 돌아온 중국에서 북경생활의 제2막이 시작됐다. 변화한 도시 풍경이 주는 낯섦도 있었지만, 그 속에 익숙함과 편안함이 묘하게 공존했다. 우선 한국기업이 북경에 많이 진출해있었다. 유수의 기업들은 중국의 값싼 노동력과 중국시장 진출에 매력을 느껴 현지에 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현대자동차였는데, 당시 북경거리에는 ‘北京现代(북경현대)’라고 적힌 엘란트라 기종의 택시들이 활보하고 다녔다. 2004년에는 사스(SARS) 바이러스가 한 차례 북경을 휘몰고 간 탓에 온 도시가 홍역을 치렀지만 유독 한국인 환자는 없었다는 소문 덕분에 너도 나도 김치를 먹겠다며 한국식당을 찾았고 자연스레 한국음식을 홍보하는 효과도 누렸다. 한국드라마는 중국의 각종 티비 채널을 통해 밤낮으로 방영되었으며 한국의 최신영화와 가요는 길거리에서 파는 DVD와 CD를 통해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나는 국제학교에 다닌 까닭에 현지 중국 학생들과 만날 기회는 없었던 대신 홍콩과 대만 출신 그리고 화교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홍콩이 영국으로부터 중국에 반환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았던 시기였고, 대만이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하나의 중국(一个中国)’이라는 인식에 합의한 지 정확히 10년이 되는 해였다.4) 중국정부가 ‘일국양제(一国两制)’의 원칙을 바탕에 두고 홍콩, 대만과 교류하며 중화민족의 통합에 힘을 기울이는 모습은 한반도 분단체제에 사고가 머물렀던 청소년기의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중국에서는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예를 들면 북한동포를 만나는 경우다. 북경에는 현재까지도 ‘해당화’, ‘옥류관’ 등 다수의 북한식당이 들어와 있으며 북한에서 온 종업원들이 직접 음식을 가져다주고 공연도 한다. 하루는 우연한 기회에 북한에서 온 청년을 만난 적이 있다. 세월이 흘러 그 당시에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가 손바닥 정도 되는 크기의 종이 위에 꾹꾹 눌러 적어준 네 글자 ‘朝鲜加油(코리아 힘내자)’는 아직도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 ※사진: 네이버(www.naver.com) 검색
(3) 2010년대 말, 빠른 성장과 혁신 속에 감춰진 ‘만만디’ 문화가 병존하는 공간

세 번째 북경생활은 이전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중국은 2008년 북경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국제적 위상이 드높아져 있었고, 2010년에는 중국이 일본의 GDP를 앞지름으로써 미국 다음으로 부강한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은 미국과 함께 G2(Group of Two) 반열에 올라 세계의 경제질서를 이끌어 가는 영향력 있는 국가로 거듭나 있었다. 중국의 이와 같은 놀라운 변화는 과거에 ‘짝퉁천국’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었는데, 실제로 짝퉁 제품이 모여있는 북경 슈쉐이제(秀水街)에 가보면 2000년대 초반 인산인해를 이루던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방문객 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이제는 중국 국산품의 품질 향상과 합리적인 가격, 그리고 온라인 시장의 활성화로 인해 다양한 상품을 가격대별로 고를 수 있는 편리한 구매시스템이 소비자들을 짝퉁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한 것으로 해석된다. 가격대가 높은 해외 브랜드보다는 오히려 샤오미(小米)나 화웨이(华为)등 가격 대비 성능이 우수한 국산을 사용함으로써 실용적인 면에 더 치중하겠다는 중국인들의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까.
결제시스템 또한 혁신적이다. QR코드의 보편화 덕분에 현금과 신용카드가 들어있는 지갑은 방 서랍 속에 묵혀 둔 지 오래다. 마트 장보기에서 비상약 구매, 심지어 커피 한 잔까지 손가락 터치 하나로 집 대문 앞에 배달된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에 있는 지인들로부터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중국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도 동전 바구니가 아닌 QR코드를 내미는가에 대한 물음인데 이것은 실제로 가능하고, 존재하며, 나 또한 수차례 목격한 사실(事实)이다.
그러나 빠른 경제성장과 기술혁신 그 이면에는 중국의 ‘만만디(慢慢地: 천천히)’ 문화가 숨어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중국은 수천 년 전 황하 문명이 시작된 곳이고, 수백 년간 대제국으로 존재하며 황제가 군림했던 땅이다. 지금도 14억 명의 중국인들은 해외 곳곳에 퍼져있는 화교 사람들과 함께 중화민족의 5000년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중국인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멀리 보고, 오래 관찰하며, 넓게 생각하는 성향이 있어 행동이 느리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렇게 천천히 시간을 가지면서 만약에 대비하고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마련해두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중국인들은 상대방의 질문에 모호하게 답변함으로써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이끌어가는 술수에도 능하다.
따라서 중국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르고 혁신에 민감하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자신에게 이득이 있을 때여야만 비로소 신속하게 움직인다는 것이지 결코 모든 새로운 변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는 말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국은 외부에서 들어온 것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창조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학습해온 나라다.5)  나는 이러한 점이 중국을 짝퉁천국에서 세계공장 그리고 이제는 세계 제조 강국으로 역전시킨 비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사진: 바이두(www.baidu.com) 검색
2. 중국은 한국과 동행(同行)하는 이웃
(1) 한국의 경제 동반자

중국은 광활하고 거대하다. 단순히 한국 국토 면적의 96배에 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크기만큼 대단한 역량과 잠재된 가능성이 무한한 기회의 땅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자원이 풍부하지 않고 국토가 협소한 데다 내수시장이 포화상태에 달했다. 반도 국가이지만 북쪽으로 육로가 막혀있어 바다와 하늘길만이 외부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한국이 살아갈 길은 수출을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이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의 수출상대국 1위가 바로 중국인 것이다.6) 앞으로의 한국경제를 위해서도 중국은 매우 필요한 무역파트너이며 중요한 경제 동반자다.
(2) 북한을 엿볼 수 있는 거울이자 지원자

남북과 양안(两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7) 원래 하나의 국가였지만 분단 이후 각각 다른 정치체제를 가지면서 현재는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양안의 3통(三通)처럼 남과 북은 왕래가 자유롭지 못하다.8)
북중은 ‘혈맹으로 맺어진 특수한 관계’라고 말할 정도로 그 관계가 두텁고 역사도 깊다.9) 북중이 긴밀하게 공조해가는 모습은 최근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북미회담 전후 동향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첫 해외 순방지로 중국을 택했고, 시진핑 주석과 16개월 동안 5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10) 중국 외교부장이 11년 만에 평양을 방문한 사건도 특이점이다.11) 한국은 이러한 중국을 활용하여 북한의 동향을 지속적으로 살피고, 남북관계 발전과정 속에서 중국이 촉매제가 될 수 있도록 역할을 요청할 수 있어야겠다.
(3) 동북아지역의 평화를 만들어가는 운명 공동체

중국의 국가전략은 ‘평화발전(和平与发展)’이다.12) 그러나 북핵문제가 해당 전략을 달성하는데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13) 북한의 핵실험은 주변국가의 안보 불안을 가중시켜 역내 평화와 안정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면서 6자회담(The six-party talks)을 제안하고 관련국들의 참여를 독려한 바 있다.14) 당시 중국이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북중 접경지역의 안보 불안이 중국 동북 3성의 경제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한반도의 비핵화는 지역의 안정과 직결되는 말이며 동북아 평화번영의 필요조건이다. 따라서 한중은 공통된 인식을 바탕으로 동북아지역의 평화를 함께 만들어가는 운명 공동체로서 함께해야 할 것이다.
  • ※사진: 북경 수도공항에서 촬영(2014년 8월)
3. 미중 사이에 놓인 한국을 향한 제언
(1) 현실 직시하고 문제 파악: “강대국들의 각축장은 한반도의 운명”

동북아지역에서 한반도는 독특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속한 대륙세력과 미국과 일본이 포함된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두 세력 간의 충돌은 4강에 둘러싸인 한반도와 그 주변을 무대로 일어났으며, 지정학적 요인에 의한 한반도의 희생은 앞으로도 불가피하다는 점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15)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미중 대결 또한 해당 문제와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강대국들의 갈등과 마찰 속에서 한반도가 마주하게 될 문제는 피할 수 없지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준비된 자세는 한반도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요구된다.
(2) 능동적 사고 필요: “한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해결방안 모색”

한국은 미중으로부터 선택을 강요받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실사구시(实事求是)의 마음가짐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능동적으로 사고하는 현명한 접근법이 필요하다. 그런 정신이 바탕에 깔려있어야만 한국이 마주한 상황을 국익과 부합하여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고 적극적인 역할수행도 가능하다.
한국은 미중 사이에 직면한 문제를 연계의 개념으로 한 단계 끌어올려 다양한 접근법을 시도함으로써 국가간 관계의 폭을 넓히고 가능성을 확대해야 한다. 관점을 바꿔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미중 사이에서 한국이 선택을 요구받는 상황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도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으로 재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국제관계는 국가이익을 중심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현실정치 세계로서, 서로가 서로의 필요 때문에 움직이기 때문이다.
(3) 다른 각도로 접근 시도: “한국은 미중이 공생해야 할 대상”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지지 말고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한국은 동북아에서 미중이 국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지원자이자 동반자, 즉 중요한 파트너라며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보는 것은 어떨까.
한국은 미국의 군사안보 파트너이자 지원자다. 한국전쟁 이후 방위를 목적으로 한반도에 주둔해있는 주한미군은 동북아지역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미국의 핵심국익이다. 미군이 대한민국 영토에 발을 딛고 있음으로써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양안관계 속 대만을 언급하면서 중국을 압박하는 카드로 활용이 가능하다. 또한, 주한미군은 일본 영토와도 가까운 곳에 있어 미일공조에 용이하다. 무엇보다 미국은 북한에게 주한미군 문제를 협상 카드로 제시할 수 있는 중요한 패를 쥐고 있다.
한국은 중국의 주요 경제 파트너이자 동반자다. 한국은 중국의 수입 1위, 수출 3위, 교역대상국 3위를 차지한다.16) 한국은 수출의존형 국가이기 때문에 상대국가에 대한 경제의존이 심화 될수록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외교 등 다방면에 걸쳐서 양국 관계가 더욱 긴밀해질 가능성이 높다. 시작은 경제였지만 외교까지 포섭이 가능한 일석이조인 셈이다. 실제로 수교 이후 한중관계는 ‘21세기동반자관계(1998년)’, ‘전면적협력동반자관계(2000년)’를 거쳐 ‘전략적협력동반자관계(2008)’로 격상했다.
상술한 바와 같이 한국은 미중 양국이 모두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그 역할의 중요도 또한 높은 나라다. 따라서 한국은 실천적인 자세로 이들 국가에 역내 안정을 함께 도모할 것을 제안하고, 동북아의 구성원인 미국과 중국이 지역의 평화 구축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기회의 장을 제공해야겠다. “한반도의 통일과 동북아의 번영을 위한 평화 중재는 우리 모두의 역할이다”는 마음가짐이 있다면 우문에 대한 현답은 굳이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나는 서로 도우며 함께 사는 삶, 즉 ‘공생(共生)’이라고 믿는다.
  • 1) 관련 논문과 서적으로는 〈Between the Dragon and the Eagle(Mical Schneider 1997)〉, 〈Between Ally and Partner: Korea-China Relations and the United States(Jae Ho Chung 2007)〉, 《기로에 선 한반도: 2010년대 미중관계 변화와 한국의 전략(김상기 2014)》, 《中美竞争格局下的中韩、美韩关系走向与韩国的选择(张慧智 2019)》 등이 있다.
  • 2) ‘도광양회(韬光养晦)’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의미로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까지 덩샤오핑(邓小平) 시기 중국의 외교방침이었다. 대외적으로 불필요한 견제와 간섭을 피하면서 철저히 국력을 키우는데 집중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2004년 후진타오(胡锦涛)가 집권하면서부터 중국은 ‘유소작위(有所作为)’, 즉 ‘해야 할 일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뤄낸다’로 대외정책을 변경했다. 과거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국제무대에 나서겠다는 중국의 의지로 해석된다.
  • 3) 연행(燕行)은 조선시대 사신들이 북경()으로 향하는 여정을 뜻하는 말이다. 사신들의 기록이 담긴 연행록을 통해 조선과 명·청의 외교(사신왕래), 경제(거래), 사회문화 등 당시 한중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4) 본문에서 언급된 ‘하나의 중국’에서 지칭하는 ‘중국’은 마오쩌둥(毛泽东)에 의해 세워진 중화인민공화국과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1949년 이후 적대관계를 유지하던 대만과 중국은 1992년 43년 만에 홍콩에서 반() 관영기구를 통해 만나 ‘하나의 중국’이라는 점에 구두 방식으로 합의했는데, 이를 다른 표현으로 ‘92공식(九二共识)’이라고 한다.
  • 5) ‘중체서용(中体西用)’은 청나라 말기 양무운동의 기본사상이다. 이것은 중국 본래의 유학을 중심으로 하되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청말 근대교육 수립에 공헌이 컸던 장지동(张之洞)이 그의 저서인 〈권학편(劝学篇)〉에서 주장한 바 있다.
  • 6) 수출액은 1,621.3억불이며 주요수출품으로 반도체, 평판디스플레이 및 센서 등이 있다(한국무역협회, 2018년 기준).
  • 7) 타이완해협을 사이에 둔 중국대륙과 대만섬을 가리켜 ‘양안(两岸)’이라고 부르며, 중국-대만관계를 ‘양안관계(两岸关系)’라고 통칭한다.
  • 8) 양안은 일국양제(一国两制)라는 틀 안에서 다른 정치체제를 유지하며 3통(三通: 通商·通航·通邮)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 9)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총리였던 저우언라이(周恩来)는 북중관계를 ‘순망치한(唇亡齿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에 비유하며 중공군의 참전을 결정했다. 이후 중국과 북한은 1961년 「조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 10) 현재까지 북중간 정상회담은 김정은 위원장 방중 4회(2018년 3월, 5월, 6월, 2019년 1월), 시진핑(习近平) 주석 방북 1회(2019년 6월)로 16개월간 총 5차례 진행되었다(2019년 10월 말 기준).
  • 11) 2018년 5월,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1박 2일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2007년 7월 후진타오(胡锦涛) 집권 시기 양제츠(杨洁篪) 외교부장 이후 11년 만이다.
  • 12)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국내외적 균형을 유지하면서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대외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다.
  • 13) 여기에서 말하는 ‘북핵문제’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면서 야기되는 문제를 가리킨다. 북한은 1985년 12월 NPT(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했으나 1993년 탈퇴 선언, 2003년 탈퇴, 2006년에 제1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 14) 중국이 의장국을 맡은 6자회담은 2003년 8월부터 2007년 9월까지 모두 여섯 차례 진행되었다. 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9·19공동성명(2005년)」, 「2·13합의(2007년)」, 「10·3합의(2007년)」가 도출되었다.
  • 15) 张小明: 《朝鲜战争的地缘政治学分析》,南开学报,2005年第3期。
  • 16) 통계에서 홍콩은 포함하지 않았다(한국무역협회, 2019년 1월 기준).

북경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수료 서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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