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에서 초국가이주자로
― 한국화인화문문학 읽기1)

전 세계에 산재한 화인(華人)은 이미 거대한 초국가적 이주자 집단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이 새로운 형태의 인류 집단의 등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함께 가지고 왔다. 이제 우리는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XX‘왕조’와 같은 역사적 개념으로 중국을 보아야 할까? 아니면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은 정치 실체로? 아니면 한족 또는 한족 문화를 핵심으로 하는 문화공동체로 보아야 할까? 중국을 보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중국인 및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살아가는 화인의 범주 또한 달라진다는 점에서 중국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 <사진1> 차이나타운 (출처:유튜브《백년한화》1부)
한국화인(한화)은 화인 집단을 구성하는 일부로 오랜 기간 한국에서 생활한 한족(漢族) 및 한족에 동화되었거나 혹은 문화적으로 한족 문화와 일체성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런 한국화인이 화문(華文)으로 창작한 문학 작품을 한국화인화문문학(한화화문문학)이라고 한다. 한화화문문학(韓華華文文學)은 다른 지역의 화인화문문학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는 동시에 화인 집단 공통의 성격을 함께 가진다. 한화화문문학은 곧 한국화인의 목소리이므로,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한다면 상술한 질문의 답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 사회의 변천과 한국화인의 거주 여건별 세대별 생활 경험이 달라짐에 따라 문학 활동에도 변화가 초래되었고, 따라서 한화 집단을 더 구체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우선 19세기 말 한국으로 이주한 화인들은 청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20세기 초반 이후 한국으로 이주한 화인들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19세기 말 한국으로 이주한 화인을 초기한화(早期韓華)라고 부른다. 둘째, 20세기 초반에서 1992년(한중국교정상화) 사이에 한국으로 이주한 화인과 1992년 이후 한국으로 이주한 화인 또한 이주의 성격에 따라 1992년을 기점으로 전자를 기존한화(先遷韓華)로 후자를 신규한화(後遷韓華)로 구분한다. 마지막으로 1950년대에 시작되어 1970~80년대에 규모가 형성된 재이주 현상으로 기존 화인 중에서 한국으로부터 다시 다른 국가/지역으로 이주한 집단은 재이주한화(再遷韓華)로 부른다. 이에 따라 기존한화, 재이주한화, 신규한화가 화문으로 창작한 문학 역시 각각 기존한화 화문문학, 재이주한화 화문문학, 신규한화 화문문학으로 구분한다.
  • <사진2> 인천항에서 들어온 한화 (출처:유튜브《백년한화》1부)
한국화인의 이주 역사는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2년 ‘임오군란’ 시기 청나라에서 보낸 3천여 명의 원병들 중에는 40여 명의 군역 상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한국화인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군역 상인들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일반 상인들의 개척이 이어졌고, 그 후로 조선으로 오는 화인이 점차 늘어나면서 상인 위주의 초기 한국화인 사회가 구성되었다. 초기한화가 이주지 한국에서 처한 특별한 사회적 지위는 한화와 한국 사회 사이에 일종의 특수한 관계를 형성했고, 이로 인해 한화화문문학은 다른 지역 화인화문문학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독특성은 주로 한화화문문학 중에 드러나는 ‘배척’이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며, 한화가 느끼는 ‘배척’에는 일종의 특수한 문화적 상상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기한화는 청나라 정부의 비호 아래서 ‘대국 국민’이라는 오만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는 한화의 한국 이주 역사가 시작되자마자 한국인으로 하여금 선망과 반감이라는 양가적인 정서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이주자에 대한 현지 주민의 배척은 세계 각지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한화가 느낀 ‘배척’은 한화와 한국 사회 사이의 특수한 관계에 의한 것으로서, 상호 작용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초기한화는 청국 정부의 든든한 지지와 자신들의 문화적인 우월감으로 인해 여전히 중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근대 시기에 이르면서 육체노동자의 신분으로 이주하는 화인들이 한국화인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화인 사회에도 변화가 발생한다. 원래 상인이 주축 이루던 것에서 노동자 위주의 구조로 전환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화인의 이미지는 선망과 반감을 동시에 안기는 대국 국민에서 ‘야만’과 ‘무지’의 상징으로 추락한다. 노동자 신분으로 한국에 온 화인들 대다수는 금의환향의 꿈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1950년대에 뜻밖에 전쟁을 겪게 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한국화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없어졌다. 제1세대 기존한화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 형성되었고, 기존한화에게는 고향의 가족들과 생이별을 한 아픔과 더불어 이주 사회에서 겪은 정신적 고통이 함께 남았다. 또한 기존한화의 이미지가 낙후되고, 무지하고, 탐욕스럽고, 인색한 수전노로 굳어지면서‘짱께’나‘왕서방’과 같은 말들이 기존한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러한 생존 현실은 기존한화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한국 사회의 ‘영원한 이방인’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 <사진3> 공화춘 (출처:유튜브《백년한화》1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정부의 교육 자치 정책에 따라 한국화인은 자신들이 설립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사실상 한국에서 태어난 제2세대, 제3세대 화인들은 유치원부터 중고등학교 과정까지 ‘중화민국’(타이완)의 교육 체제하에서 모국어 즉 중국어(國語) 정규 교육을 이수했다. 또한 타이완 정부의 지원으로 타이완에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이로 인해 제2세대, 제3세대 기존한화는 교육 수준이 비교적 낮고 생업에 매달리느라 문화나 문학 활동에 종사할 여유가 없었던 제1세대 기존한화와는 달리 한화화문문학 창작의 주력군으로 자리를 잡았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 한국화인이 한국을 떠나 타이완이나 미국 등지로 재이주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 현상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러 더욱 고조되었다. 기존한화의 재이주는 어떠한 의미에서는 한화화문문학 창작 진영의 부분적인 이동으로도 볼 수 있다.
20세기 중엽부터 기존한화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으며 한국 사회에서 배척적 분위기를 체감했고, 기존한화의 자치적인 교육 시스템 또한 기존한화의 단결력을 더욱 강화하고 유지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로 인해 제2세대, 제3세대 기존한화는 한국화인 자신들의 간행물을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쏟았고, 이러한 노력은 타지로 재이주한 뒤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미국으로 재이주한 기존한화는 미국에서도 계속해서 한국화인의 화문 간행물을 발행했고, 타이완으로 재이주한 기존한화는 타이완에서 개인 작품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들은 다양한 문학 형식을 통해 한국화인의 곡절 많은 삶과 불공정한 사회 현실에 대한 저항, 한국화인 사회의 폐단에 대한 반성을 써내려갔고,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다. 그 외에도 그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담아내기도 했다.
한국화인의 인구수와 구성상의 독특성 및 한국 문화, 중국 대륙 문화, 타이완 문화로부터 받은 복잡다단한 영향도 한화화문문학이 다른 지역의 화인화문문학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나타내도록 만들었다. 이로부터 비롯된 한화문학의 독특성은 주로 한화화문문학 속에서 그것만의 혼종성으로 표현된다.
한화화문문학 속에는 한국화인이 구두어(입말)에서 스스로 창조한 자신들만의 언어인 ‘한화중국어(韓華漢語)’가 나타난다. ‘한화중국어’는 한편으로는 기존한화로 하여금 언어란 넘을 수 없는 장벽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 고향 사람들과의 사이를 갈라놓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한화들 간에 응집력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한화화문문학 속에는 한화가 서면어(글말)에서 이루어낸 특수한 혼종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구체적으로 그들이 화문문학 창작을 할 때 스스로 만들어낸 바 한국어를 그대로 음역한 어휘라든가 표현 방식 및 사고방식의 형태로 뒤섞여서 표출된다. 또 한화화문문학 속에는 한화의 혼종적 정체성도 나타난다. 기존한화는 자신이 중국인 신분으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을 중국 대륙의 중국인을 구분하고, 일시적으로 한국을 왕래하는 상인이나 관광객들과도 구분한다. 동시에 그들은 적극적으로 현지화(한국화)를 실천하고, 한국 사회의 일부가 되고자 노력하면서 한국 사회의 인정을 갈망한다. 제3세대, 혹은 그 후 세대의 기존한화는 현지화가 더욱 심화됨에 따라 그들의 혼종적 정체성 내에서 한국화의 비중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1992년 8월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한국 정부에서 실시한 각종 정책과 이주 조건 완화 등으로 중국 대륙에서 한국으로 온 화인의 숫자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한국으로 이주한 화인들의 대다수는 교육 수준이 높고 일정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으나, 이주 기간이 비교적 짧아 문학 창작에 종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들은 한화화문문학 창작의 잠재적 역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출판된 신규한화의 문학 작품을 살펴보면 한국에 이주한 지 20여 년밖에 되지 않았고 또 중국 대륙에서 중국어(漢語)/표준어(普通話) 교육을 충분히 받았던 신규화인의 구두어 중에도 이미 혼종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규한화도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이중 거주 형태를 선택하면서 모방 등의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현지화를 실천하면서 이 과정에서 혼종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 <사진4> 하단 한화학교 학생 (출처:유튜브《백년한화》2부)
한화화문문학 속에 나타난 이러한 혼종적 정체성은 한화가 이미 다중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속성은 한데 모아놓은 조각들처럼 그렇게 쉽사리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서로 뒤섞이고 융합되어 다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초국가적 이주자가 날로 증가하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이런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것은 이미 인류 전체가 다함께 직면한 과제가 되었다. 중국은 이미 하나의 통일된 개념이 아니다. 소위 상상의 중국 공동체라는 것 역시 하나의 공동체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적이나 정치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 문화 공동체의 관점에서 화인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화인의 입장에서 서서 그들이 중국 혹은 한족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한편, 근본적으로는 그들이 전통적 한족 공동체로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혹은 전혀 없으며, 개인의 선택에 기초하여 다중적인 정체성을 구축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리처드 세넷의 고전적 정의에 따르자면 도시란 "이방인들이 서로 마주칠 만한 장소"를 뜻한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세계화를 지향하고 있는 오늘날, 코로나와 같은 특수한 상황은 또다시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한다. ‘이방인’들이 그 도시에 어쩔 수 없이 더 오래, 때로는 매우 장기간 체류하게 되었을 때 그 도시의 다양한 거주민들은 이방인들을 맞아 어떻게 대할까? 교정할 수 없을 만큼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로 간주되면 신체 접촉과 대화, 사회적 교류, 종족 간 혼인을 금지할까? 이방인들의 이질적 내용을 ‘비이질화' 할까? 2) 아니면 모든 사람의 각종 차이를 존중하고 개개인의 정체성의 혼종성과 다중성을 인정하여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초국가이주자로 환대할까?
  • <사진5> 신세대 한화 (출처:유튜브《백년한화》2부)

동아대학교 중국학과 양난

  • 1) 이 글은 필자 저서 ≪韓國華人華文文學論 ― 多變的身分,多重的認同≫(台北:秀威出版社,2020.07) 중 일부를 참고하고 수정하였음을 밝힙니다.
  • 2) 지그문트 바우만 저, 이일수 역, 《액체근대》, 서울: 도서출판 강, 154-166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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