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이야기-南泉斬猫

“남전스님이 고양이를 죽이다”
남전참묘는 당대(唐代)의 걸출한 선사(禪師)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이 795년부터 안휘성(安徽省) 지주(池州)의 남전(南泉)에 선원을 짓고 30여 년 동안 머물던 때 일어난 일화이다. [무문관] 제14칙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하루는 사원의 동쪽과 서쪽 양당의 승려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서로 가지려 말다툼한 적이 있었다.
남전이 고양이를 잡아 쥐고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자네들 중에서 누구든지 바른 말을 하면 이 고양이를 살려주겠다.”

대중들이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는 가차 없이 고양이를 두 동강 냈다. 저녁에 조주가 돌아왔을 때, 스승은 그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주었다.
조주는 아무 대꾸도 없이 신발을 벗어 머리에 이고 걸어 나갔다. 그러자 스승이 말하였다.

“자네가 여기에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남전참묘-불교조각실풍경
남전은 중국 선불교 특유의 돌발성과 기상천외한 방편으로 수많은 사람을 깨우쳐준 마조의 제자이다. 마조-남전-조주로 이어지는 홍주종(洪州宗)은 지금까지 일부 그 명맥을 유지하는 선종의 5가 7종과는 다른 계통이지만, 선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수많은 공안을 남긴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의 법맥이다. 위의 남전참묘도 남전과 그의 제자 조주 사이에 오고간 선문답이다.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다투는 승려들을 보고 남전은 “바른 말을 하면 고양이를 살려 주겠다”고 하였다. 여기서 ‘바른 말’이란 선문답에 자주 나오는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부처란 무엇입니까?”,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하는 등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즉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아무도 대답을 못하자 남전은 바로 고양이를 죽여 버렸다. 이 공안을 두고 흔히 남전이 불교의 첫 번째 계율인 불살생을 범하면서까지 제자들을 깨우쳐주려 했다고 한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탐욕이다. 탐욕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이다. 욕망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등의 경험을 통해 즐거운 느낌을 주는 대상에 집착하여 내 것으로 소유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붓다는 욕계-색계-무색계의 심층의식까지 들어가 마지막 상수멸정에 이르러 ‘지각하는 나’가 소멸하는 대각에 이르게 된다. 그는 <나>와 <내 것>이 없는 텅 빈 공에서 무명을 조건으로 현상계의 고통이 전개되는 것을 본 것이다. 따라서 붓다는 괴로움은 본래 없는 것이지만, 집착에 의해 발생하며, 여덟 가지 바른 길을 따를 때 괴로움이 소멸한다는 가르침을 펼쳤다.
선은 단순명료하게 붓다의 깨달음을 전한다. 무식한 나무꾼 혜능이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금강경] 한 구절에 깨달은 것처럼 선은 집착 없는 텅 빈 마음을 곧장 깨닫게 하고, 대상에 물들지 않은 그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다. 그리고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에 물들지 않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온전한 마음은 매우 예민하게 깨어있기 때문에 그 순간의 자극에 즉각 반응한다.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서로 내 것이라고 다투던 승려들은 분열되지 않은 생생하게 깨어있는 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바른 대답>을 하지 못하였고, 그 무지와 탐욕 때문에 결국 고양이는 죽게 되었다.
저녁에 돌아와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조주는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벗어 머리에 이고 걸어 나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고양이, 동당, 서당, 조주, 남전, 신발, 머리 등은 모두 보이는 대상을 분별하고 그 대상에 이름을 붙인 것들이다. 우리는 이 대상들이 원래 분리되어 있고 서로 다르다고 알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임을 알고 있는 조주는 즉각 말없이 신발을 머리에 이고 걸어 나가는 것으로 무분별지를 보여주었다. 이 침묵의 언어를 알아들은 남전은 “자네가 여기에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하였다.
달마대사와 양무제의 대화
후한시대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후 5백여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인도불교는 구체적인 일상의 언어와 행위를 통해 깨달음을 전수하는 선불교로 재탄생했다. 이 인도불교와 선불교를 매개하는 중요한 인물로 달마가 등장한다. 남인도 브라만 출신인 달마는 527년(梁 普通8년) 중국에 도착하여 금릉(金陵)에서 당시 독실한 불교도였던 양무제(梁武帝)를 만난다. 양무제가 물었다.
  • <사진> 달마대사와 양무제

“짐이 즉위한 이래 무수히 많은 절을 짓고, 무수히 많은 경전을 베끼고, 수많은 승려에게 공양을 베풀었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소?”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소?”

“이는 인간과 하늘의 작은 결과를 받는 번뇌의 원인일 뿐이니,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 같고, 비록 있는 것 같지만 실제가 아닙니다.”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이요?”

“청정한 지혜는 묘하고 원만하여 본체가 원래 비고 고요하니, 이러한 공덕은 세상 사물로 구하지 못합니다.”

무제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일가는 성스러운 진리요?

“텅 비어있어서 아무런 성스러움이 없습니다.”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

“모르겠습니다.”

무제가 알아듣지 못하니, 대사는 근기가 맞지 않음을 알았다.([경덕전등록]제3권)

그 후 달마는 낙양으로 가 숭산의 소림사에서 9년 동안 침묵으로 면벽하다 자신의 팔뚝을 자르면서까지 법을 구하는 혜가를 만나 그에게 청정한 지혜를 전한다. 달마의 지혜란 무엇인가? 양무제와의 대화로 미루어 볼 때 그것은 텅 빈 고요함이다. 이 고요함은 일체 처에 편만하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사물이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시선의 전환이 필요할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 주변의 사물에 주의를 고정시키기 때문에 그 사물이 놓인 허공은 보지 못한다. 우리 주변에 아무런 사물이 없을 때 우리는 그 허공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까? 우리는 형상 없는 허공을 두고서 결코 그것이 크다, 작다, 멀다, 가깝다 하는 등의 비교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허공에 무슨 성스러움과 세속이 있겠는가? 이렇게 아무 것도 없다면 도대체 양무제 앞에 서 있는 달마는 누구란 말인가? 그래서 양무제는 물었다.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 하니 달마는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붓다가 45년간 펼친 무상-고-무아의 진리를 중국인들은 이와 같이 아름다운 일화로 축약하였다.
조화롭고 분열되지 않은 새로운 지구공동체를 꿈꾸며
삼황오제로부터 시작되는 중국의 역사는 주왕조의 분열에 이르러 제가백가가 등장하면서 저마다 이상사회를 실현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실질적인 통일은 법가를 이용한 진시황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진나라는 곧 멸망하고 한 왕조에 의해 채택된 유가는 중국문화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한족 내부의 분열이 아닌 이민족의 침입에 의해 다시 중국대륙이 조각난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현실적인 유가와 이상적인 도가가 융합되면서 이 분열된 마음을 이어 붙여주었다. 그리고 이 시기 전파된 불교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지식으로 중국인들에게 제자백가에서 느껴보지 못한 지적 만족을 주었지만, 당나라에 이르러 중국인들은 다시 그들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유경향으로 돌아와 인도불교를 중국적 사유인 선불교로 재탄생시켰다.
중국인은 현실적이다. 그들은 만약 부처의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적 유물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 바람은 실현되었다. 조주가 남전을 처음 만났을 때, 조주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자, “서상원(瑞象院)에서 왔습니다.” “여전히 성스러운[瑞] 상[象]은 보고 있는가?” 하니, “성스러운 모습은 보지 못합니다만, 누워 계신 여래는 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여래는 머리로 생각하는 관념이 아니라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난 모든 것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후에 조주에게 어떤 중이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하고 묻자 그는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라는 유명한 대답을 하였다. 이때 조주는 사물로서의 잣나무를 말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잣나무와 나, 언어의 본체는 모두 비어 있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두고 말하더라도 비어있는 언어로 비어 있는 대상을 가리킬 뿐이다. 즉 선문답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내재된 공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텅 빈 본성이 우리의 본질이며 부처라는 것이다. 조주는 남전을 만나기전 17세에 “돌연 나는 붕괴되었고, 머물 집이 사라졌다”는 체험을 이미 했기에 모든 것 속에서 여래는 보았던 것이다.
21세기 지구촌은 신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분열과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평화, 화해, 풍요, 사랑, 기쁨보다는 갈등, 분열, 투쟁, 양극화라는 말이 더욱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고 싶어 하는데 무슨 국적이 필요하겠는가? 최근 미국의 로스엔젤레스 비치시티에서는 전 세계 다섯 곳의 장수마을을 연구하여 도시에서도 자연환경-이웃-가족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블루존 프로젝트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7년 만에 비만율 25%, 흡연율 36%가 줄어드는 좋은 성과를 내었다. 가능성은 낮지만 사상의 용광로에서 선이 탄생했듯이 중국에서 다시 전 인류와 지구생태계를 껴안는 평화롭고 풍요한 삶의 방식이 탄생하기를 꿈꾼다.

부산대 철학과 강사 구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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