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의 실수와 회한

중국 말 중에서 “영웅도 미인관은 넘기가 힘들다(英雄难过美人关)”는 말이 있다. 영웅이라 함은 대체적으로 아무리 험한 관문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통과해서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하기 마련인데 그 험난하다는 관문은 다 통과하면서도 ‘미인’이라는 관문은 참으로 넘기가 힘들다는 말이겠다. 잘못 독해하면 영웅도 넘기가 힘든게 미인관인데 범인들이야 당연히 넘지 못할 것이고, 그 관문 앞에서 장렬하게 쓰러지는 것 또한 너무도 당연하다고 읽혀질 수도 있다. 뭐 더 솔직히 말하면 예쁜 여자들 앞에서 무조건 쓰러지고 싶은 남성들의 욕망을 영웅까지 들먹여가며 정당화 한 말이 아니겠는가?
서기 197년 동한 말기, 황제의 권위는 무너져 제후들은 저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자기 땅 지키기에 여넘이 없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도적이 되어 날뛰던 시기에 조조라는 한 인물이 그 얼마나 도덕적인 사생할을 유지했겠는가. 도덕적이라는 것도 지금의 기준으로 말해서 도덕적인 것이지 엄격히 말해서 “ 일부일처다첩제(一夫一妻多妾制)” 였던 당시로서는 권력자의 욕망이 흘러가는대로 여성을 소유할 수 있었던 시기였으니 그것을 지금의 도덕관으로 뭐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중국에서 일부일처제를 법적으로 엄격하게 규정한 것은 1931년 <중화소비에트혼인조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으니 15명의 부인을 둔 조조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런 도덕관의 적용은 1700년 뒤에나 가능했다.
그러나 조조에게도 그 시대에 한 여인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은 쓰라린 과거가 있었다. 그것도 다른 한 여인을 탐한 탓에 아들과 조카와 아끼던 장수를 잃는 대가를 치르고 난 뒤였다. 당시의 일부일처다첩제 속에서 정부인을 뜻하는 처(妻)는 오직 1명이고 본부인이 아닌 첩은 그 수를 제한하지 않았다. 그 때 조조의 정부인은 성이 정(丁)씨인 정부인(丁夫人)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부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첩인 유부인이 아들 조앙을 낳고 일찍 죽자, 정부인은 조앙을 데려다가 마치 자기가 낳은 아들처럼 지극정성으로 키웠고 조앙 또한 어머니를 효성스럽게 따랐다고 한다. 그러니 조조에게는 후계 문제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아들 조앙이 죽었다. 197년 완성에서 투항했던 장수(張繡)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조조는 거의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났다. 조조가 장수의 숙모인 추씨 부인을 병사들을 시켜 데려다가 강압적으로 첩실로 삼자 이를 보고 분에 못이긴 장수가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아무리 첩실을 마음대로 들일 수 있고 또 그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던 시대이지만, 정씨 부인은 아들의 목숨까지 바꿔가면서 첩실을 들인 조조의 행위를 그냥 보고 넘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정씨 부인은 조앙을 잃고 거의 실성한듯 하루 하루를 울며불며 지냈다. 아들이 죽어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 돌아온 조조를 원망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정씨 부인에게는 아들 하나가 인생의 전부였지만 조조에게는 모두 25명의 아들이 있지 않은가. 조앙이 죽었을 때는 변씨 부인이 낳은 아들 조비, 조창, 조식이 있었고, 또 환씨 부인이 낳은 뛰언난 조충이 있었다. 그러기에 조앙의 죽음이 정씨 부인의 아픔만큼 조조에게 크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커다란 슬픔에 잠긴 정씨 부인의 이런 모습 때문에 조조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정씨부인에게 친정으로 가도록 배려했고 정씨 부인 역시 미련없이 조조를 떠났다.
기록되지 않고 전해지지 않은 조조와 수 많은 여인네와의 관계를 다 헤아려 볼 수는 없지만, 유독 한 여인과의 얘기는 <삼국연의>에 제법 은근하고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대목은 조조에 대한 극명한 평가를 가능케 부분이기도 해서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조조는 197년 완성을 치기 위한 남정을 실시한다. 이런 기세에 눌려 완성 전투에서 제대로된 전투를 하기도 전에 장수(張繡)가 투항을 한다. 남쪽의 주요한 군벌 중 하나인 장수가 투항을 했으니 조조 역시 기분이 느긋해졌다. 어느 날 저녁 장막에서 술 한 잔 걸치고 나니 은근히 춘심이 돌았던 모양이다. 그것을 제대로 눈치 챈 조카 조안민이 이리저리 수소문해 투항한 장수의 숙모가 과부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정보를 얻었다. 조조는 즉시 그 여인네를 데려다가 미색을 살펴 본다. 그 시대에 한 성을 점령한 조조로서는 그 성안의 모든 것을 제 맘대로 처분할 수 있었던 권한을 가졌었다. 조조의 눈에 비친 장수의 숙모인 젊은 과부는 가히 경국지색이었다. 풍류객 조조가 그냥 넘어갈 위인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삼국연의> 전권을 통해서 남녀간의 운우지정을 은근하게 나마 표현한 유일한 장면이 펼쳐진다. 한자가 주는 함축의 맛이 더해져서인지 소설 원문이 훨씬 더 은근해 보인다.

操見之, 果然美麗, 問其姓 (조견지, 과연미려, 문기성)
조조가 그 녀를 보니, 과연 아름다웠다. (조조는 그녀에게) 성씨를 물어보았다.

婦答曰 : 妾乃張濟之妻鄒氏也 (부답왈, 첩내장제지처추씨야)
부인이 응답해서 말하기를, 소첩은 장제의 처 추씨 이옵니다.

操曰, 夫人識吾否? (조왈,부인식오부?)
조조가 말하길: 부인은 내가 누군지 아시오?

鄒氏曰 : 久聞丞相威名, 今夕幸得瞻拜 (추씨왈: 구문승상위명, 금석행득첨배)
추씨부인이 말하길: 오래 전부터 승상의 높은신 존함은 들어왔습니다. 오늘 저녁 행운을 얻어 (이렇게) 뵙게 되었습니다.

操曰 : 吾爲婦人故, 特納張繡之降, 不然滅族也 (조왈: 오위부인고, 특납장수지항; 불연멸족야)
조조가 말하길; 내가 부인 때문에 특별히 장수의 항복을 받아 주었소, 그렇지 않았다면 멸족을 시켰을 것이오.

鄒氏拜曰 : 實感再生之恩 (추씨배왈: 실감재생지은)
추씨가 절을 하면 말하길: 진실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신 은혜를 느끼옵니다.

操曰 : 今日得見婦人, 乃天幸也, 今宵願同枕席, 隨吾還都, 安享富貴, 何如? (조왈: 금일득견부인, 내천행야. 금소원동침석,수오환도,안향부귀, 하여?)
조조가 말하길: 오늘 부인을 보게되어 천만 다행이오. 오늘 밤 나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고, 나를 따라 환도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어떠하오?

鄒氏拜謝. 是夜共宿於帳中 (추씨배사. 시야공숙어장중)
추씨는 감사의 절을 올렸다. 그날 밤 둘이는 장막에서 같이 잤다.

  • 사진출처: 바이두 이미지
이 대목을 읽다 보면 조조의 가증스런 인간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점령지의 한 여인을 탐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거짓말과 노골적인 협박을 서슴치 않고 있는 조조의 민낯이 보인다. 완성전투에서 장수의 항복을 받은 것이 마치 추씨 부인 때문에 그런 것처럼 말하고, 그러지 않았다면 모두가 멸족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음험한 협박을 하는 모습이 혐오스럽기조차 하다.
이렇게 조조가 추씨 부인을 차지하자 이에 모욕을 느낀 장수는 다시 조조를 배반하고 그를 죽이려 한다. 이 싸움에서 조조의 아들 조앙이 온 몸에 화살을 맞고 죽었던 것이다. 정씨 부인이 조조와 추씨 부인의 은근한 모습을 자세히 알리도 없지만 이런 조앙의 죽음만으로도 조조 곁을 떠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해서 조조가 친정으로 가버린 정부인을 모른 채 하고 그대로 두지는 않았다, 직접 정부인의 친정으로 찾아가 같이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한 두번 간 것도 아닌듯 했다. 그러나 친정으로 찾아 온 조조를 정씨 부인은 차겁게 대할 뿐이었다. 베틀에 앉아 옷감만 짤 뿐 조조가 가져 온 마차를 타고 돌아가자는 권유를 싸늘하게 물리쳤다. 천하를 호령하는 조조이자, 성깔 또한 만만치 않았던 조조라 할지라도 자식의 목숨을 지키지 못한 아비를 탓하는 부인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것도 다른 여자와 놀다가 일으킨 사단이 아니었던가. 결국 조조는 어쩔 수 없이 정부인의 뜻을 받아들여 관계를 끊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비, 조충, 조식의 생모인 변씨 부인을 정실로 맞아들였다. 그러면서 친정에서 돌아오지 않은 정씨 부인에게는 개가를 허가했다 평생 혼자 있으면서 자기와의 의리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배려였다. 그렇지만 그런 조조의 호의마저 정씨 부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끝까지 개가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정사 <삼국지. 후비전(三國志.后妃傳)> 배송지주에서 인용한 <위략(魏略)>에 의하면 조조가 임종 직전 과거를 회상하면서 말하길, “내가 평생 동안 했던 그 많은 일들 중에서 커다랗게 후회할 일도 없고, 또 누구에게 특별히 미안하지도 않지만, 내가 저승에 가서 큰 아들을 만났을 때 그 녀석이 내게 엄마를 찾아달라고 해대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천하의 간웅 조조도 그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았던 가슴 속 깊이 숨겨두었던 말을 한 것이다. 조조인들 아비를 살리기 위해 아비 조조를 말에 태워 먼저 보내고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온몸으로 맞아 죽어가던 아들의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었을까. 처첩이 15명이었던 조조였지만 그런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기어이 돌아오지 않았던 정부인에게 어떻게 미안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조조가 인정한 유일한 실수이자 회한의 한 대목이다.

동아대학교 김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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