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창으로 본 “걸림돌”

지난해 공식적으로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 인류학 현지조사를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졸지에 나는 중국의 변방을 연구하려다 학문적으로 더 변방으로 밀려 나갔다.
전지적인 시점에서 사물의 전체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예전에 접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사건의 이면은 물론 표면으로 드러난 진위를 파악하기도 힘든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거의 스무 해 동안 중국을 드나들면서 얻은 지식이라는 것도 보잘것없는 잡동사니에 불과하다는 자조를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연구불가 통보를 받을 때의 실망은 차원이 달랐다. 연구자 개인의 시간과 정력 전부를 바쳐야 ‘중국’이라는 총칭 아래 뭉뚱그려진 실체를 조금이나마 그릴 수 있을 텐데, 그나마 남은 것을 바치려 해도 바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럴 때일수록 시기를 기다리며 더욱 많은 전문서적을 읽는 것이 학자의 임무이겠지만, 학자 이전에 작가인지라 자꾸 다른 통로로 곁눈질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소설이다. 소설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현실은 좀 별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일단 소설을 들면 ‘이 안 들어 있는 말들은 모두 진실(물론 사실은 아니겠지만)일 거야. 소설은 거짓말이 통용되지 않는 장르거든’ 하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단정한다. ‘라오서(老舍)가 1966년 8월 25일 베이징 타이핑호(太平湖)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그 날, 필자가 태어나기 한참 전의 그 시점에 이미 내가 이렇게 단정할 근거는 생긴 셈이 아닐까. 작가는 시대의 희생양을 자처하는 사람들이겠지. 작가란 아무리 유명해봤자 변방에서 두리번대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글로 옮기는 사람에 불과한데, 과연 그들이 거짓말을 쓸 이유가 있을까? 더욱이, 거짓말의 대가가 충분히 크다면 몰라도 겨우 밥벌이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렇게 상상하며, 스스로 작가인 주제에 다른 작가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그들의 책을 읽는다.
  • 사진출처 :클립아트코리아
침체된 대륙의 경제를 일깨울 때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실용적인 생각은 주효했다. 이 실용적인 생각에서 출발한 개혁과 개방이 초래한 것은 예상보다 컸다. 분명 기존에 없던 자유와 복지를 불러왔고, 더 큰 자유와 복지에 대한 갈망도 불러왔다. 하지만 현재 중국은 명백하게 이 갈망을 억누르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도 당이 장악하고자 하며, 작가가 쓰는 글의 내용도 당이 지도하고자 한다. ‘무슬림’, ‘투르크’, ‘동성애’, ‘노동조합’ 등을 입에 올리면 관리 대상이 되고, 일단 관리 대상에 오르면 합법적으로 그 그물을 벗어날 도리가 없다.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과연 오늘날 중국 작가들은 행복할까? 그들을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그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들의 은밀한 불만을 통해 사회의 숨겨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최근에 내게 왕웨이롄(王威廉)의 소설집 <<책물고기(書魚)>>가 들어왔다. 그를 “궈징밍, 한한, 장웨란, 디안 등… 장르소설이나 성장소설에 치우친 대중작가들”과는 달리 “순문학적 역량”을 느낄 수 있는 작가로 평가한 역자(김택규)의 소개도 한몫을 했다. 말하자면, 비록 단출한 단편 다섯이 들어 있는 소설집 한 권이지만, 나는 그 안에서 시진핑 시대를 살아가는 소위 빠링허우(80년대 이후 출생 세대)의 사회관을 보기를 고대했다.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는 사람을 죽였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와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는 이가 소금호수에서 만나 서로 감정을 나누며 치유를 경험하는 이야기였다. 해진 곳을 아리게 하는 황량한 소금밭에서도 사람의 마음이 서로 연결되면 상처는 아물 수 있구나 생각했다. <책물고기>는 책 속에 살고 있다는 전설의 벌레를 실제로 본 편집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설명될 수 없는 신비함이 사라진 삶은 이야기가 없는 삶, 그런 삶은 정말 황량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복수>는 광저우 사람들에게 멸시당하지만, 철거당할 위기에 처해 모든 광저우 토박이들이 떠나갈 때까지 집을 지키는 아버지를 통해 뿌리의 의미를 탐색한다. 그때까지 빠르게 읽어 나갔지만, 이 편에 이르러 나는 무슨 피로를 느꼈는지 건너뛰고 픈 충동을 느꼈다. <걸림돌>이라는 작은 작품은 건너뛰고 읽은 <베이징에서의 하룻밤>은 잘 짜인 성장소설이었다. 글쓰기를 소재로, 이상과 한계 사이에서 흔들리며, 아리지만 담담한 현실을 살아가는 남녀 한 쌍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네 편 다 예쁘고 섬세한 이야기들이다. 이제 중국 소설가들도 일본의 섬세한 대가들 못지 않은 수준에 달했구나.
그러나 바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그만 화가 나고 말았다. ‘그런데 도대체 ‘중국’은 어디 있는 거야? 정말 할 말을 다 한 거야? 혹시 이 작가가 자기 검열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소설가 모옌(莫言)이 노벨 문학상을 타고나서 “핵심은 작가 내면의 자유”라면서 “검열도 필요하다”고 했을 때 받았던 그 모욕감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 때 내가 내린 결론은 꽤 단순했다. 모옌이 진심을 말했다면 그는 작가의 자격을 애초에 갖추지 못한 사람이고, 마음에 없는 거짓말을 했다면 그가 다루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배신했다고 말이다. 그렇게 겨우 마흔 쪽도 안 되는 <걸림돌>은 읽지 않는 채 책을 덮었는데, 덜 읽은 책을 머리맡에 두는 습관 때문에 몇일 전 무심코 다시 책을 들었다.
  • 사진출처 :클립아트코리아
<걸림돌>의 주인공은 광저우와 선전을 오가며 일하는 편집자다. 선전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그는 예쁜 아가씨와 동석하려다 보기 좋게 거부당하고, 서양인으로 보이는 할머니와 함께하게 된다. 할머니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한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여인의 딸이었다. 그녀는 중국인의 삶을 통째로 받아들였지만, 노년이 된 지금 고향으로 가 1938년 나치에게 희생된 외조부모를 기념하는 동판을 인도人道에 설치하려 한다. 이 동판은 인류에게 죄를 지은 자들, 앞으로 죄를 지으려 하는 자들에게 경고하고자 보도에 주위보다 몇 밀리미터 돌출시켜 설치하는 ‘걸림돌’이다.
그 때 주인공도 할머니에게 자신의 조부모와 외조부모 이야기를 하게 된다. 외조부모는 개혁개방 전에 홍콩으로 탈출했고 지금도 홍콩에 살고 있다. 조부모는 콘돔에다 바람을 넣어서 목에 걸고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그러나 조부모는 무수히 시도했으나 결국 해안에서 서로 끌어안은 채 경비대에게 발각되었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중에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서야 당시 거의 이백만 명이 휘황찬란한 홍콩으로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무려 이백만이었어요! 그러니 개혁을 안할 수가 있었겠어요? 그래서 주장강 삼각주에 경제특구가 생겨난 거예요.”
하지만 그의 조부모 어떻게 되었을까?
“한 고향 어른의 말씀으로는 바닷가의 맹그로브 숲에서 마지막으로 두 분을 뵈었대요. 두 분은 서로 꼭 끌어안고 계셨다고 하더군요. …… 두 분은 도망치지 못했지만 돌아갈 마음도 없었다더군요.”
해안경비대에 발각된 그의 조부모의 이야기는 신문을 통해 다시 등장한다. 수많은 유골들 중에도 특이한, 서로 꼭 껴안은 채로 발견된 유골이 바로 그들의 것이 터이다.
당시 홍콩의 번영이 어느 정도였길래, 주강 하구에서 불야성을 바라보던 이들 수백만이 탈출을 감행했을까? 그 전 19세기, 혼돈의 중국을 피해 아메리카로 떠난 이들이 모두 번영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찾아 떠난 것일까? 왕웨이롄이 <책물고기>에서 한 번 언급한 카프카의 표현처럼 “그냥 여기를 떠난다, 그냥 여기를 떠나 내처 간다, 그래야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노라”(전영애 역) 하는 마음으로 떠난 것은 아닐까? 실제로 그들은 떠남 자체로 역사를 바꾸었지 않은가? 주인공은 말한다.
“이 세상은 조금이라도 매끄럽지 않은 것을 못 참아서 너무 평평해져버렸어요. 저도 너무 평평해져 버렸죠.”
무소불위, 즉 걸림없이 사는 이들이 활개를 치는 오늘임을 작가가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인간이 공장에서 찍은 보도블럭이 아니라면 두드러지지 않지만 미세하게 돌출된 걸림돌이 없을 리 없다. 인간사회에서 작가도 그런 걸림돌일 것이다. 보도 위로 몇 밀리미터 올라온 걸림돌도 걸림돌이다. 나 역시 작가이면서 다른 작가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고, 비교적 매끄러운 세상을 살아왔다.
편평한 길은 애초에 기계의 길이지 사람이 갈 길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길도 온통 우뚝우뚝한 영웅들만 서 있는 돌길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의 힘은 몇 밀리미터의 섬세함을 부각시키는 힘이었다. 함께 가는 이들을 용기 없는 이라고 손가락질하고 미워하는 대신 머리를 더 숙여 그들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걸림돌을 발견하라는, 가늘지만 매서운 회초리질이었다.
신장의 현실에서 환멸을 느끼고 동남의 해변에서 약간의 위안을 얻는다. 실망할 시간도 없다. 떠났던 옛 사람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목적지를 모르더라도, 그냥 내처 가야 한다.

푸단대학교 공원국

페이스북 트위터 인쇄하기 링크복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