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관점에서 한중관계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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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있는 문제지만 나는 역사학을 사회과학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역사학이 다루는 영역이 개인의 삶을 넘어서 사회와 국가, 세계를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학문적 효용 또한 개인의 삶 뿐 아니라 사회적 집단적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역사 공부와 역사 교육은 한 사회의 현재와 미래의 향방에 매우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방향타 역할을 해야만 하고 그럴 경우에만 존재 의미를 가진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외국사로서 중국사, 그 가운데에서도 중국현대사를 전공하는 내게 있어서 공부의 의미는 너무나 분명하다. 그것은 현재의 우리에게 중국인, 중국사회 혹은 중국이라는 국가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구체적으로 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한중관계의 역사적 맥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는 모든 중국사 연구자들에게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이를테면 외국사로서의 중국사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한국연구자들에게 한중관계사는 하나의 독자적 학문 영역이 아니라 연구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필수 영역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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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이전 ‘전통시대’의 한중관계를 책봉조공관계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책봉이나 조공의 구체적 내용이나 의미에 대한 입장이 한국과 중국 학계에서 크게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중국학계에서는 책봉조공관계를 ‘속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로 종속적인 관계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비하여 한국 학계에서는 형식적인 주종관계일 뿐 실질적인 독립적 관계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19세기 중반 이후 근현대사의 경우 한중관계의 기본적인 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전통시대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아니면 동일한 성격의 것일까? 19세기 말 이후 20세기 중반까지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내가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호조(互助)’와 ‘길항(拮抗, 대립)’의 양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측면 가운데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둘 것인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는 점에서 명쾌한 해답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호조’와 같은 긍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해온 그간의 연구들에 비하여 이러한 양면적 관점 제기는 학계에 새로운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컨대, 올해로 성립 10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경우 그것이 중국에 만들어진 때문에 태생 자체가 중국에 대한 의존을 피하기 어렵지만 그간의 연구들에서는 그 의존의 실제 상황 속에 들어있는 복잡한 문제들을 간과한 채 중국 측의 임시정부에 대한 고마운 ‘지원’만을 강조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의 ‘지원’이라는 것이 가지는 내면을 자세하게 살펴본다면 결코 일방적인 ‘지원’이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본다면, 임시정부에 대한 장제스(蔣介石) 국민정부의 지원이 본격화되는 계기로 받아들여져 왔던, 1932년 4월 말의 윤봉길의거의 경우, 이제까지의 연구들에서는 장제스와 국민정부가 한 한인청년(윤봉길)의 장렬한 의거에 대하여 크게 ‘감동’하였고 그 결과로서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측의 ‘지원’이 나오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윤봉길의거를 전후한 시기 장제스의 일기나 국민정부 외교부 회의록 등에 대한 상세한 검토 결과는, 윤봉길의거에 대한 중국 측의 이해가 사실은 ‘감동’과 거리가 먼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국민정부의 최고지도자 장제스와 외교부 측에서는 1932년 1월에 일어났던 일본군의 상하이 지역에 대한 첫 번째 침략전쟁 곧 상하이사변(흔히 淞滬抗戰이라고 부른다)을 해결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 끝에 막 종전협상을 이끌어낼 상황에 있었던 때문에 협상의 막바지에 발생한 윤봉길의거는 하나의 장애로 받아들였다. 윤봉길의거와 관련하여 우리 학계에서 전설처럼 인용해온 이야기, 곧 장제스가 “한 사람의 조선 청년이 백만 중국군이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발언을 했다는 것도 전혀 사실이 아님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1932년 10월 이후 진행된 우리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두 방향의 지원도 그 동기를 따져보면 결코 우호적인 ‘지원’이 아니었음을 보게 된다. 한 가지는 장제스의 직접적인 지휘 하에 있던 소장 군인그룹(민족운동위원회)을 통한 김원봉 중심의 조선의열단에 대한 지원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국민당 조직부를 통한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에 대한 지원이었다. 김원봉 측에서는 중국 측의 지원을 받아 난징(南京) 부근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만들어 청년 장교들을 육성하였고 김구 측에서는 뤄양(洛陽)에 있던 중국중앙군관학교 내에 한인특별반을 만들어 한인 청년군관들을 양성하게 되었다. 기존의 연구들에서는 이렇게 양성된 한인군관들이 이후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혁혁한 성과로 받아들여지는 한국광복군의 기반 세력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 때 이루어진 중국 측의 ‘지원’이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측의 지지와 ‘지원’을 대표하는 것으로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장제스와 국민정부 군가위원회의 기본 목표는 상하이사변으로 드러난 일본의 전 중국에 대한 침략 의도에 대응하기 위하여 전국적인 수준의 ‘장기(長期)’ 항전을 위한 군사전략을 세우는 것이었고 그 가운데 이미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가 있던 만주(동북) 지역에서의 항전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또 그런 차원에서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한국독립운동 세력의 ‘동원’이 중요해졌기 때문에 한국청년 군관 양성을 ‘지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기본적인 목표는 한국독립에 대한 지원 그 자체라기보다는 ‘장기항전’에 한국인들을 동원하는 것에 있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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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지원’의 결과 양성된 한인 군관들의 이후 행적을 통해서도 중국 측의 지원 동기를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혁명간부학교와 뤄양 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을 통하여 양성된 한인군관의 상당수가 중국 측의 의도대로 만주 지역 항일활동에 투입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한인 군관 양성의 보다 중요한 결과로 칭송되는 한국광복군의 경우에도 한국 독립운동을 위한 독자적 활동이 완전하게 통제된 형태로 중국 측 군사위원회 소속으로 독자적 지휘권이 없는 일종의 용병과 같은 존재였음이 이미 여러 연구들을 통하여 밝혀져 있다. 이른바 한국광복군 구개준승(九個準繩)을 중국 측에서 제정하였는데 여기에는 소속이나 지휘권이 모두 중국 측에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일제의 패망 이후 광복군이 한반도에 진입하게 될 경우에도 중국 측의 지휘 아래 활동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한국독립운동 세력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한인군관들의 만주 지역 파견이든 한국광복군의 중국 측 소속이든 간에 결과적으로 일본에 대한 합동 군사작전에 참여하는 것이니 나쁠 것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중국 측의 ‘지원’은 ‘호조’의 측면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중국 측의 ‘지원’이 갖는 이러한 내막을 이해할 때 그 ‘지원’이 갖는 통제와 ‘길항’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고 그런 때에야 비로소 당시의 중국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알게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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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지원’에 대한 이러한 검토 작업은 내가 전공 분야로 삼고 있는 근현대의 전 시대에 걸쳐서 적용될 수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윤봉길의거나 윤봉길의거 이후 진행된 한국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지원’ 문제 이외에도 예컨대 1910년대 이후 확인되는 대표적 중국 혁명 지도자 쑨원(孫文)과 한국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나 쑨원의 한국독립 문제에 대한 태도, 1920년대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측 지도자들의 입장, 1930년대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드러나고 있는 중국 측의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지원’ 문제, 종전(終戰)을 위한 군사적 협력과 종전 이후의 국제관계 설정을 위해 1943년 11월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중국 측이 보여준 한국독립에 대한 ‘지지’와 그 이면에 들어있는 전후 한반도에 대한 중국 측의 정책, 1944년 이후 중국 외교부를 중심으로 꾸려진 “전후 한국문제에 대한 대책회의”에서 논의된 중국 측의 전후 한반도 전략, 1945년 8월 종전 이후 11월까지 전개된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을 둘러싼 중국과 미국 간의 협의 문제 등은 한결같이, 앞에서 언급한 윤봉길의거와 그 직후부터 전개된 한국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지원’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호조’라는 측면과 함께 ‘길항(대립)’이라는 상반된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이상 191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확인되는 한중관계의 기본 맥락이 ‘호조’와 ‘길항’이라고 할 때 이러한 기본적 구도와 관점은, 오늘날의 한중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사드를 둘러싸고 벌어진 중국 측의 무차별적인 보복이나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대응, 미세먼지와 같은 환경문제를 둘러싼 중국 측의 무책임한 발언 등은 지난 세기 동안 한중관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던, 그래서 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중국 측 대응의 단면들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또 다른 희망은 그나마 역사 속에 희미하게 확인되는 ‘호조’의 전통이니 현재의 한중관계를 바라볼 때에도 항일전쟁의 와중에서 면면히 드러나고 있는 ‘호조’의 긍정적 역사 경험을 소중하게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부산대학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 배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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