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그리고 문화

전혀 예측 못했던 코로나19의 장기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실하게 정부의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넘어서서, 거의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다. 휴대폰도 거리두기를 하는지 스팸을 제외하고는 며칠에 한 번 정도 학교의 업무와 관련된 전화만 울릴 뿐이다. 그마저도 반갑게 느껴진다. 내가 업무전화를 반갑게 여기다니 단언컨대 이는 코로나 부작용이 분명하다. 전화벨이 울린다. 역시 업무전화이겠거니 하면서도 전화를 받으러 옮기는 발걸음 내내 이는 자그마한 설렘. 발신자 표시서비스가 보편화되면서 발신자의 이름이 뜨지 않는 전화는 스팸일 가능성이 농후해 어지간해서는 전화를 받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이홍*’라는 낯익은 이름, 몇 해만에 대학동기한테 전화가 온 것이다. 반가움도 잠시 나는 잠시 나를 설레게 해준 전화벨과 낯익은 이름 석자에 홀려서 받은 전화에 코가 꿰어 이 글을 쓰고 있다.
장황하게 긴 편폭을 할애해 이 글을 쓰게 된 사정을 늘어놓은 것은 이 글의 제목인 ‘문화’에 대한 포석이다. 위의 사설을 통해 나의 일상을 ‘코로나 문화’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리고 발신자 표시와 관련해 “휴대폰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에게 이 글을 쓰게 만든 대학동기의 이름 석자중 한 글자를 “*”로 처리하는 것은 “개인정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굳이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이 글을 쓰게 한 동기의 안부인사는 “청탁문화”로서 우리가 지양해야 할 문화이다. 이처럼 우리는 생활방식 내지는 일상을 “ ~ 문화”라고 이야기 하고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관광체육부(2007:7-9)의 『2000 문화향수 실태조사』’라는 설문에 의하면 ‘문화’라는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역사유산(25%)이고, 그 다음이 대중문화(20.1%), 현대예술(17.6%), 전통예술(16.1%), 인간의 행위/생활방식(9.9%)의 순서이다. 이는 문화를 ‘높은 수준의 인간의 지적·예술적 활동과 그 결과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교과서를 통해 주입된 엘리트주의적 관점이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각설하고, “동서중국 웹진”에서 문화라는 용어에 대한 한국인들의 용례와 이미지를 써달라고 집필의뢰를 하지는 않았다. “*”로 표시된 나의 대학동기는 “인문학자로서 문화를 강의하는 교수로서 중국문화에 대한 칼럼”을 써달라고 했다. 그런데도 나는 이렇게 장구하게 한국의 일상 내지는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원고료를 더 받기 위한 꼼수는 결코 아니다. 중국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서이다.
고대문헌에 의하면 문화의 ‘文’과 ‘化’는 무늬, 변화와 같이 독자적인 어원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전국 시대 말기에 편집된 ‘주역’에서는 “인문을 관찰하여 천하를 교화시킨다(《周易》之《贲卦》‘观乎天文,以察时变,观乎人文,以化成天下’)”는 식으로 ‘문’과 ‘화’는 병렬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단계를 거쳐 西漢 이후 ‘문화’는 합성어가 되어 자연계와 구분되는 인간에 의해 성취된 제반 분야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문화라는 용어의 변천을 살펴보았으니 다음은 문화와 중국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우선 중국에서 문화가 활용되는 용례부터 들여다보면서 중국인들이 강박과 같이 문화에 집착하는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没文化(교양이 없다)’, ‘文明点儿(격식을 갖추어라)’라는 말처럼 중국어에는 일상에서 문화 내지는 문명과 관련된 표현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文化程度”는 무슨 뜻일까? 한국식 한자표현으로는 다소 어색한 표현이기에 ‘교양수준’ 혹은 ‘문화수준’ 정도로 짐작들을 할 것이다.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용례는 아니다. 중국의 ‘国家标准GB4658-84(国家文化程度代码标准)’라는 코드분류에 의하면, “文化程度”는 대학원, 대학, 전문대,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등으로 구분되는 ‘국가의 문화교육 보급 및 발전 정도’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학력수준’에 상응하는 말이다. 이처럼 한자를 공유하는 문화권이지만 우리의 용례와는 달리 중국은 ‘교육’과 관련하여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중국이 ‘교육’과 관련하여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용례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중화사상’의 토대를 마련한 공자를 마주하게 된다. 춘추시대에 천하의 안정(天下一統)을 위해서는 西周의 예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克己復禮’를 주창했던 공자. 그 외침의 저변에는 이민족의 난입에 의해 西周가 東周로 바뀌며 무너진 중국의 자존심 회복을 위한 변론이 깔려 있던 것이다. 즉, 공자로부터 ‘주나라의 수도’ 혹은 ‘주의 통치지역’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중국’이라는 말에 ‘문화적인 우월지역’이라는 의미가 가미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승한 후대 사상가들의 윤색을 거치면서 ‘중국’이라는 개념은 ‘문화적 우월성을 지닌 중심부’라는 의미로 심화되었고, ‘夷夏之辨’이 고착화되었다. ‘이하지변’이란 황허문명을 이룩한 華夏族(중국인)은 도덕과 윤리로 가공된 성현들의 가르침, 즉 문화를 배우며 정체성을 확립했기 때문에 그러한 교육을 받지 못한 이민족들과는 다르다는 ‘선민의식’이다. 이러한 배타의식이 면면히 이어져 현대중국어(普通話)에서 ‘문화’와 ‘교육’의 연계가 이루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중국인들에게 있어 ‘문화’는 중국인이기 위한 정체성의 상징으로 일상에 널리 퍼져 문화를 담는 그릇인 언어로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하지변’이란 문화적 선민의식은 ‘중화사상’으로 확대재생산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중국의 고대왕조는 ‘천자’가 ‘천명’을 받아 ‘천하’에서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사(替天行道)’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통치를 하였다. 그래서 ‘四海一家(전 세계가 한 집안)’와 ‘東夷西戎南蠻北狄’처럼 고대중국인들이 생각한 世界觀인 네모난 땅덩어리와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바다가 바로 ‘天下’이고 그 중심에 문화적으로 우월한 ‘중국’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天下觀을 바탕으로 중국의 皇帝 즉 天子가 天下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고대 중국인들이 생각해낸 ‘中華思想’이며, 그 중추에는 문화적으로 우월한 중국과 중국인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에게 있어 문화는 대내적으로는 정체성의 상징이었으며 대외적으로는 확장의 근거였다. 이처럼 수천 년을 이어온 ‘중화사상’은 아편전쟁 이후의 아픔을 딛고, 다시 한 번 ‘중국의 꿈(中國夢)’으로 소환되었다.
2012년 11월 29일 ‘부흥의 길(复兴之路)’이라는 전시회에서 习近平은 처음으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中华民族伟大复兴)’을 핵심으로 하는 지도사상인 ‘중국몽’을 언급하였다. 공자의 ‘극기복례’처럼 문화적 선민의식이 깔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제시한 시진핑의 ‘중국몽’은 중국인들의 의식에서 꿈틀대던 ‘중화사상’의 발현이다. 그리고 일년 뒤인 2013년 12월 30일, 18기 중공중앙정치국 12차 집체학습에서 시진핑은 중국몽 실현의 구체적 방법론으로 문화를 제시하였다.
“국가의 문화실력인 소프트파워의 제고는 ‘두 개의 백년’에 대한 분투목표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인 중국몽의 실현과 관련된 것이다. 사회주의 선진문화의 홍양, 문화체제개혁의 심화, 사회주의 문화의 커다란 발전과 번영의 추동, 전체 민족문화창조의 활력 증강을 위해 문화사업의 전면번영과 문화산업의 급속성장을 추동하여야 하고, 인민들의 정신세계를 부단히 풍부히 하여 인민들의 정신역량을 증강시켜야 하며, 문화전반의 실력과 경쟁력을 부단히 증강시켜, 사회주의 문화강국건설의 목표를 향해 부단히 전진하여야 한다(提高国家文化软实力,关系‘两个一百年’奋斗目标和中华民族伟大复兴中国梦的实现。要弘扬社会主义先进文化,深化文化体制改革,推动社会主义文化大发展大繁荣,增强全民族文化创造活力,推动文化事业全面繁荣、文化产业快速发展,不断丰富人民精神世界、增强人民精神力量,不断增强文化整体实力和竞争力,朝着建设社会主义文化强国的目标不断前进。).”
고작 이 두 문장에서 시진핑은 무려 9회에 걸쳐 ‘문화’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문화에 집착하는 중국인들의 정서와 중국지도자의 역사인식을 살필 수 있다. 문화정치학이론에 따르면, 지배 집단들은 정치·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문화 영역에서도 그들 집단의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그래서 문화를 단순히 고급 예술이나 지적이며 정신적인 발전 과정과 같이 관념론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의미의 투쟁으로 간주한다. 문화를 중국몽의 방법론으로 내세우고 무한반복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중국. 지금 중국은 세계를 상대로 의미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공자를 앞세웠던 후진타우의 소프트파워(軟力)에서는 희미하게 보이던 중국의 ‘大國崛起’가, 문화를 내세운 시진핑의 중국몽에서는 ‘중화사상’으로 발현되며 명징해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단순히 코로나19로 인해 ‘혐중’ 또는 ‘차이나 포비아(China Phobia·Sinophobia·중국 공포증)’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결과만은 아닐 터인데, 2021년 6월, 한국을 비롯한 17개 국가의 18,85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한 여론조사 (https://www.ajunews.com/view/20210628101409348)의 결과에 의하면, 응답자의 약 69%가 중국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몽의 시행령이라 추정되는 ‘限韓令’을 기점으로 혐중 정서가 확산되었다. ‘限韓令’의 강화에 비례해서 MZ세대들의 혐중 정서는 더욱 커졌고,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나라 대학의 중국관련 학과와 과목은 침체기를 걷고 있다. 한국의 중국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며, 장기적으로 우리의 대중 협상력 약화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중국문화특강 수업 첫 시간에 나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중국이라는 이웃이 싫다고 이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사 간들 외면하며 살 수 있는 관계도 아니다. ‘중국이 좋아서, 중국이 싫어서, 모든 상황에서’ 중국은 우리에게 고정불변의 상수이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중국, 중국인을 읽어야 하고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문화라는 입체적 관점으로 살펴야 한다.” 갸우뚱 거리는 학생들의 표정이 귀엽다. 한국의 중국전문가로서 커나가는 모든 MZ세대들의 건투를 기원한다.
旗開得勝, 馬到成功 !

창원대학교 중국학과 이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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