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오만

정화 항해도(부분) 사진출처: (https://www.chinaunsv.com/html/2014/proTech_0828/844.html0)
외국의 프랑크라는 자들은 이전 왕조에서는 중국과 왕래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을
먹기 좋아해서, ……큰 솥에 물을 끓이고 쇠 바구니에 아이를 담아 솥 위에 얹어놓고 쪄서 땀이
다 빠지면 꺼내서 쇠 솔로 딱딱한 껍질을 벗기는데, 그때까지 아이가 살아 있다.
그제야 죽여서 배를 가르고 위장을 제거한 뒤에 쪄서 먹는다.
정화 보선(寶船) 모형 / 사진출처: :(https://baike.baidu.com/tashuo/browse/content?id=814b65ae4f23efb75977767d&fr=qingtian&lemmaId=23805)
이것은 명(明)나라 신종(神宗) 만력(萬曆) 2년(1574)에 염종간(閻從簡)이 명나라를 중심으로 인근 및 왕래가 있는 각 나라와 지역, 변경 민족에 대해 기록한 《주역주자록(殊域周咨錄)》에서 언급한 이른바 ‘프랑크(佛郞機, Frank)’에 대한 내용이다. ‘프랑크’는 원래 서양의 철제 대포의 이름이지만 근대 이전의 터키인과 아랍인 내지 유럽인에 대해 광범하게 쓰이던 칭호였는데, 명나라 때에는 주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사람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명사열전(明史列傳)‧213》 〈외국(外國)‧6〉에서는 이곳이 동남아시아의 나라로서 1528년에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오늘날 말레이시아에 속하게 된 말라카(馬六甲, 滿剌加, Malacca) 왕조와 가깝다고 했으니, 당시 중국 지식인들의 지리에 대한 지식의 한계와 ‘프랑크’로 대표되는 서양인들에 대한 인식 실태를 잘 보여준다.
사실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에 보이는 ‘대진(大秦)’이나 ‘해서국(海西國)’ 등에 대한 기록은 ‘천하’의 중심으로서 자존(自尊)을 강조했던 한(漢) 왕조도 자신들이 세계 유일의 문명국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고, 원(元) 왕조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거의 100개에 가까운 유럽의 지명이 등장한다. 또한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 1403~1424 재위) 때의 환관(宦官)으로서 오늘날 ‘중국의 콜럼버스’라고 불리는 정화(鄭和: 1371?~1433?)가 이미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대륙까지 다녀왔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명나라 중‧후기의 이와 같은 지적 퇴보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명나라는 중엽 이후로 쇄국정책을 실시하면서 정화 관련 자료까지 모두 폐기해 버려서, 심지어 상당한 명성을 지닌 지식인들조차 유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러 버렸다. 게다가 1521년에서 1524년 사이에 광동(廣東) 둔문도(屯門島), 1549년에 복건(福建) 주마계(走馬溪)에서 발생한 해전은 ‘프랑크’에 대한 인식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과적으로 ‘통상(通商)’을 요구하는 서양인들과 서양 선교사들이 각기 바다와 내륙에서 거의 1세기 동안 활동했지만 중국인들은 심지어 제법 학식이 깊은 이들조차도 그들과 그들의 나라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했다. 1613년에 중국에 들어가 30년 이상 머물렀던 예수회 선교사 알레니(艾儒略, Giulio Aleni,1582~1649)가 세계 오대주(五大洲)를 소개하면서 유럽의 지리와 인문, 물산, 풍속, 문학, 종교 등등을 기록한 《직방외기(職方外記)》를 편찬했지만 중국에서는 양정기(楊廷綺: 1557~1627)와 이지모(李之藻: 1565~1630) 등 극소수 인사들에게만 잠깐 주목을 받았을 뿐이다. 심지어 청(淸) 왕조에서 《명사》 〈의대리아전(意大里亞傳)〉을 편찬했던 이들조차 그것을 서양 선교사의 허풍이라고 간주했을 정도였다. 바로 그런 지식의 공백으로 인해 《수역주자록》의 ‘기록’과 같은 허황된 소문이 진실처럼 떠돌 수 있었고, 마테오리치가 북경(北京)에 있던 그 시기에 중국의 민간에서는 소설 《삼보태감서양기(三寶太監西洋記)》(이하 《서양기》로 약칭)가 나돌고 있었다.
루쉰[魯迅]이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에서 명나라 때의 대표적인 ‘신마소설(神魔小說)’──오늘날 흔히 ‘판타지’라고 부르는 양식에 가까운 소설임──로 꼽았던 이 작품은 명나라 말엽의 나무등(羅懋登: 1517~?)이 정화의 해양 원정을 소재로 각색하여 1597년 전후에 완성한 것이지만, 작품 곳곳에는 명나라 말엽 중국인들의 편협하게 퇴보한 세계관을 반영한다. 실제 현실과 괴리가 큰 이러한 상상에서 작자는 외국 주민들의 피부색과 복장 등을 괴이하게 묘사하거나 심지어 차별적인 언어로 경시하기도 하며(제8회, 제72회), 외국은 대부분 중국보다 경제적으로 낙후되었고 문화적 야만적이라고 여기고, 게다가 중국에 우호적이지 않은 나라들은 군대와 무력의 힘으로 굴복시킨다. 작자는 종종 “중국이 있어야 오랑캐가 있으니, 중국은 군부(君父)요 오랑캐는 신자(臣子)”라고 강조하면서, 정화 일행이 도착한 나라마다 이른바 중국의 양식으로 정해진 ‘항서(降書)’와 ‘항표(降表)’를 한문(漢文)으로 써서 바치게 하고, 여건이 허락하면 정기적인 조공(朝貢)을 바치게 한다. 이런 행위들은 그야말로 교화를 빙자한 정벌 이상의 무엇이 아니니, 결국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조건이 전혀 마련되지 않았고, 세계에 대한 지식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채 “오직 산과 바다를 어지럽히고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속임수를 쓰며, 살인과 약탈을 일삼고, 어린아이를 삶아먹는 외국 귀신[番鬼]과 빨간 오랑캐[紅夷]라는 형상만” 자신들의 기억과 상상 속에 단단히 고정시킨 명‧청 교체기 중국의 초라하고 폐쇄적인 자아 인식과 세계관을 적나라하게 반영한 것(周寧, 〈海客談壕洲: 帝制時代中國的西方形象〉)이며, 또 어느 연구자의 말처럼 이것은 그야말로 ‘사회의 집단적인 상상’(廖凱軍, 〈《三寶太監西洋記》中的異域形象〉)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순전히 중국인의 입장에서 독선적이고 편파적으로 규정된 문명과 야만의 차이는 오히려 작품 자체에 담긴 일화에서 파탄을 드러낸다. 이 소설의 제36회에서는 자바 왕국[爪哇國]의 반항을 진압한 삼보태감이 그 나라에서 중국 사신들과 170명의 수행원들을 죽이는 ‘방자한’ 작태를 보였다는 이유로 도살에 가까운 해전이 끝난 후 3천 명의 포로들을 참수하고 가죽을 벗긴 후 살을 발라 삶아 먹었다고 서술했으니, 객관적인 관점에서는 중국인들이 더 야만적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 정화 함대의 제7차 항해 노선
    사진출처:(http://ziyitang.com/News2_show.asp?Id=299)
  • 나무등, 《삼보태감서양기》
    사진출처: (http://auction.artron.net/paimai-art89640443)
놀라운 것은 이런 인식이 아편전쟁(阿片戰爭)이 일어나 중국이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1840년대 이후에도 지속되어서 청나라 말엽까지 《서양기》가 다양한 판본으로 민간에서 상당히 널리 유행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양의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이화원(頤和園)이 쑥대밭으로 변하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어쩌면 문학, 특히 고전문학은 과거의 영광뿐만 아니라 착오와 실패를 기억하고 반성하여 후세에 귀감과 교훈을 남기는 데에서 가장 큰 존재 이유를 보장받는다고도 할 수 있겠다. 특히 소설과 같은 서사문학은 사건 자체뿐만 아니라 거기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된 인물들과 방관자들의 행태와 심리까지 섬세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다른 예술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문학도 독자의 관점에 따라 내용이 오해되고 평가가 바뀔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을 타고났다.
패권주의를 선언한 트럼프의 미국과 그에 맞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강대국으로서 중국의 위상이 두드러지는 요즘의 세계정세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것이고, 중국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백년만의 굴기(屈起)’라고 자부할 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행정부가 전 세계를 상대로 독선적인 무역정책을 펼치고, ‘일대일로(一帶一路, The Belt and Road)’를 내세운 시진핑의 확장주의가 타이완과 필리핀 등을 억압하고 있는 현재 상황의 이면에는 결코 낯설지 않은 《서양기》의 그림자가 뚜렷하다. 테러 방지를 내세워 비자 발급과 입국 절차를 까다롭게 하고, 자국의 이익을 우선으로 내세운 FTA ‘협상’을 압박하는 행위는 무력시위를 벌이며 한문으로 된 ‘항서’와 ‘항표’를 작성해 바치라고 위협한 《서양기》 속 정화의 모습과 별로 다를 게 없다. 개인 관계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폭압과 멸시는 대개 상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며, 그 결과 역시 비극적일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안타깝지만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글 ㅣ 인제대학교 국제어문학부 중국언어문화전공 홍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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