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제국 서평

기존의 패권국가와 빠르게 부상하는 신흥 강대국이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 가설에 따라 미국과 중국이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제목의 그레이엄 앨리슨 전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 학장의 책 『예정된 전쟁』이 출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올해 초에 바로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다. 중국은 어느덧 미국을 위협하는 유일한 국가로 부상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 사드 배치를 두고 우리 사회는 한동안 홍역을 치른 바가 있지만 만약 이런 가설이 현실화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한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가 싶더니 놀랍게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합의 소식이 연이어 전해졌다. 이와 함께 ‘차이나 패싱’이 회자되던 차에 김정은 위원장의 갑작스런 방중은 우리는 물론 전 세계에 중국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중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이고 세계 속의 중국은 어떠하였는가?
이런 의문을 가진 이에게 오드 아르네 베스타(Odd Arne Westad)의 『잠 못 이루는 제국』(부제는 1750년 이후의 중국과 세계)은 자못 흥미롭고도 유익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단지 개별 국가로서 중국을 다루는 것에서 탈피해서 중국과 외부세계의 관계를 개괄적으로 소개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중국 내부의 다양성과 외부세계와의 교류의 다양성을 주목하면서 관찰하고 분석한 책이다. 중국에 관한 책이 이미 많이 나왔고 지금도 계속 쏟아지고 있지만 이런 각도에서 서술된 책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아마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작가인 오드 아르네 베스타 교수는 노르웨이 출신으로 런던 정경대 국제사 교수와 국제문제 · 외교 · 전략연구소(IDEAS) 소장을 역임하고, 2015년부터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 정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는 당대 국제사와 냉전사의 전문가로 냉전을 미국과 소련의 대립일 뿐만이 아니라 미소의 제 3세계에 대한 간섭과 주도권 다툼으로 파악한다. 이를 통해 작금의 제 3세계 혼란을 이해하는 열쇠를 찾고자 시도한 또 다른 저서 『글로벌 냉전: 제 3세계 개입과 우리 시대의 형성(The Global Cold War)』는 15개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작년 6월에 내한해서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오늘날 중국과 두 개의 한국(China and the Two Koreas Today)’을 주제로 특별 강연을 했으며, 황해문화 2017년 가을호(통권 96호)에 '북핵, 냉전, 동아시아, 세계'를 주제로 한 대담이 실리기도 했다.
  • 사진출처: YES24
중국도 다른 제 3세계와 마찬가지로 대외정책에서부터 발전모델에 이르기까지 냉전의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중국과 냉전의 관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청 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한 이후의 장기적 역사의 추세 속에 이러한 문제를 위치지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책은 이러한 관점을 확대시켜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1750년부터 21세기 초기까지의 중국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다.
중국을 연구하는 사람이 반드시 부닥치게 되는 기본적 문제가 중국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단순한 질문이지만 답안은 연구자의 시각이나 연구방법에 따라 매우 다양하고 복잡할 것이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중국은 중국의 정체성, 경계, 그리고 중국에 관한 정의(定義)를 매우 긴 기간에 걸쳐 변형시키고 조절해왔던 문화이자 국가이자 지리적 중심이다.”(14-15쪽) 이 책에서는 시간적으로 건륭황제가 즉위한 지 14년째인 1750년을 기준으로 그 이후의 중국과 세계의 상호작용을 다루고 있는데, 이는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중국의 제국적 면모를 강조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청 제국 전성기였던 바로 이 시기에 확정한 지리적 경계를 현대중국이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이어받은 것은 건륭의 판도다.”중국은 지구상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 역사의 연속성과 무게가 영향을 강하게 미치는 나라지만 무작정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기보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중국을 확정해야 비로소 중국과 외국, 중국인과 외국인의 상호관계를 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아편전쟁이나 오사운동을 기점으로 중국 근현대사를 다루는 다른 책과 차별화된 접근이다.
중국의 근현대사는 한마디로 거대한 청 제국이 점차 쇠락해서 하나의 현대적 민족국가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대략 시간적 추이에 쫒아가면서도 주제를 부각시켜 다루고 있다. 전통적 역사서에서 말하는 편년체와 기사본말체를 결합한 방식이라고 할 만하다.
1장(변모)과 2장(제국주의)에서는 19세기 아편전쟁이 중국사회에 가한 거대한 변화를 다룬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중국이 세계 다른 나라와 맺는 관계가 기본적으로 불평등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지만, 침략과 파괴만이 아니라 무역, 여행 등의 기회를 제공한 측면도 있었으며 청 왕조도 단지 보수적인 것만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3장(일본)에서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중국과 일본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일본이 (중국의) 새로운 국가와 사회의 창출에 영감을 주는 존재에서 중국의 존립에 최대의 위협으로 변화”(129쪽)해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4장(공화국)은 1900년부터 1920년대 후기까지의 시기로 청 왕조를 뒤엎고 중국이 아시아 최초로 공화국을 건립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는 춘추전국시대에 버금가는 혼란기로, 중앙권력이 빈번히 교체되고 외국의 무력간섭과 지방할거의 국면이 전개된 시기다. 이 장은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인데 “당시에 중국은 어떻게 쪼개지지 않을 수 있었는가”라는 평소의 의문에 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국가로서 중국은 외교업무를 수행할 사명을 가진 중앙정부로서의 외양을 갖출 정도의 응집력은 유지하고 있었다.……중국의 국경선이 쇠퇴기의 청 제국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는 놀라운 사실은, 공화국이 가장 약했을 때조차도 통합된 국가라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증언해준다. 만주에 대한 전면적 통제에 거의 근접한 일본조차도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이 복수의 외국 점령지로 쪼개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러시아/소련을 포함한) 서구열강은 지방의 권력자들, 지방적 정치 분파나 정당 등을 통해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열강들은 허약한 중앙정부를 중앙정부의 폐지보다 더 선호하면서, 동시에 열강에 최고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지방의 권력집단들을 통해서 일하고 싶어 했다.”(134쪽)
5장(중국의 외국인)과 6장(해외의 중국인)은 이 책이 다른 중국근현대사와 구별되는 핵심적인 부분 중의 하나로, 18세기 이래 외국인과 중국인의 민간교류를 다루고 있다. 선교사, 상인, 학생, 혁명가, 해외화교 등 보통 사람들의 다양한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그 중에서 외국인의 한 사람으로 김일성의 활동을 간략하면서도 요령있게 서술한 부분도 있다. (212-213쪽)
이를 통해 그는 아편전쟁 이래의 중국의 역사가 단순히 치욕의 역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중국과 세계가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상호 작용을 주고 받은 적극적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7장(전쟁)에서는 중국의 항일전쟁을 다루고 있고, 8장(공산주의)에서는 중국의 공산주의 운동과 중국과 중국공산당의 대외관계를 탐색하고 있다. 베스타는 중국이 공산주의를 선택하게 된 것을 “청렴이라는 유교적 관념이 소련이 보여준 조직력과 기술이라는 근대성과 결합했는데, 이 근대성은 과거에 중국을 욕보였던 제국주의 세력의 근대성보다 더 진보한 것이었기”(299쪽)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9장(고립된 중국)에서는 1960년 중소분열로부터 1970년대 초 미국과 관계 정상화 이전 시기를 다루고 있다. 편견이 작동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작자는 마오쩌둥 시기의 중국외교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소련과의 갈등과 문혁이 분명 중국에 커다란 고통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모든 것을 마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결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에드가 스노우처럼 마오쩌둥을 “에이스 카드를 넉 장 가진 크리스천의 조용한 확신”(마크 트웨인의 용어)을 가진 전략가로 보지 않더라도(오빌 셸, 『돈과 힘』, 문학동네, 2014) 『중국 이야기』를 쓴 키신저의 현실적이고 냉정한 분석과도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10장(중국과 미국)과 11장(중국과 아시아)에서는 1970년대 초 미국과 관계 회복한 이래 중국이 점차 고립에서 탈피해 새롭게 국제사회의 무대로 등장하는 역사적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사실 중국이 미국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마오쩌둥의 권위나 결단이 없었더라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이 점에 대해 베스타는 여전히 상당히 인색하게 평가하고 있다.“황당하게도 마오의 초상화는 여전히 톈안먼 광장에 당당히 걸려 있다.”(387쪽)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의 변화는 톈안먼 사태로 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크게 보면 미국화라고 평가하고 있다. “중국 자본주의는, 사회 안전망과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갖춘 유럽이나 일본식 자본주의와는 많이 달랐고, 오히려 사회적 유동성과 기회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놀랄 만큼 비슷했다.”“지난 20년간 이루어진 자본주의 혁명으로 중국은 개인의 삶의 목표나 국가의 운영방식이라는 면에서 적어도 13세기 몽골 왕조 이후에 가장 외부세계(특히 미국)과 비슷해졌다.”(402쪽)
중국이 다시 아시아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이후의 사태에 관해서도 각 나라별로 간략하게 일별하고 있다.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외교적 과제와 관련해서는 “이후 북한에서 무슨 일이 있어나든 중국 지도자들은 중국이 조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남한의 바람을 지지한다고 남한 대중을 설득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안고 있다”(431쪽)고 진단하고 있다. 아시아의 대표자의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는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현재 상당히 악화된 상태이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인만큼 아주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있다.
중국의 미래와 관련해서 작가는 근대성(중국에서는 현대성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평자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이라는 제하의 결론에서 “중국이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이 된다고 해도 세계정치를 선도하는 입장에 서지는 않을 것이고,”“미국의 힘이 점차 약화되면서 보다 다극화된 세계로 나아간다”고 전망하고 있다. 유럽인으로서 작가는 이러한 미국의 정치(및 군사)와 중국의 경제의 불균형이 갈등을 야기했을 때 유럽의 중요성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지만 그리스를 비롯한 내부의 위기를 안고 있는 유럽이 얼마나 역량을 발휘할 지는 미지수이다. 중국의 정치체제와 관련하여 “적당히 독재적인 정부가 중앙에 위치하고 이 정부가 성 정부에 더 많은 자치와 소수민족의 문화적 자치를 마지못해 인정하는” 정도에 그칠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의 정치체제도 장기적으로 결국 변화할 수밖에 없겠지만 가까운 장래에 이를 목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조심스럽게 결론내리고 있다.
최근 고전교육에 매진하고 있는 중국의 신좌파 사상가인 간양(甘陽)은 중국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서양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 일이 있지만 베스타가 볼 때 “오늘의 중국은 몇 세기 동안 내부적으로 발전해온 것과 외국에서 도입된 것이 한데 어우러진 혼합체”이다. 중국의 근대성도 중국의 독특한 과거 역사와 19세기와 20세기에 세계적으로 일어난 일련의 변화를 중국이 수용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잠 못 들 정도로” 끊임없이 불안했지만 변화에 잘 적응함으로써 오늘의 중국을 이룩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중국(의 외교)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제시한 세 개의 키워드, 즉 공평 정의, 규칙과 의식절차, 자기 중심성은 기억해둘만하다.(15-16쪽) 공평 정의(번역서에서는 仁이라고 하였지만)는 전통적인 유교관념의 영향과 현대사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다. 규칙과 의식절차(예법으로 번역)은 위계질서와 거기에 따른 구성원의 책임과 의무, 정치적 의미라기 보다 문화적 의미가 강한 자기중심성은 중국과의 외교에서 우리도 참고할 가치가 있는 사항이다. 중국에 관한 책이지만 조선과 한반도에 관한 언급(105-113쪽, 212쪽, 308-311쪽, 428-431쪽)이 나오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역사와 미래가 중국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다시금 자각하게 만드는 미덕도 있다.

글 ㅣ 영산대 황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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