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중국, 모순적이고 복잡한 것들로 가득 찬 중국의 변화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북경에서 몇 백 년의 역사를 지닌 전문대가(前門大街)는 사라져 있었다. 전문(前門)은 천안문 광장의 남쪽에 있는 오래 된 큰 문이다. 그러니까 천안문 광장의 북쪽에 천안문이 있고 남쪽에는 전문이 있다. 전문에서부터 남쪽으로 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이 바로 전문대가(前門大街)인데 이 길은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 북경의 대표적인 상업 거리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의 세종로나 종로와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길에는 백 년이 넘은 만두집, 중국의 대표적인 중의약방인 동인당(同仁堂), 오래된 차 가게인 장일원(张一元) 등 이름만 들어도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이어서 고도(古都)의 역사적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17년 전쯤 북경에서 중국어를 공부할 당시 나도 이곳에 간혹 들러 명성에 비해 서민적이었던 가격에 감격하며 만두를 먹고 장일원에서 차를 사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작년 겨울에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고도(古都)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전문대가를 중심으로 거대한 ‘도심 테마파크’가 깔끔하게 들어서 있었다. 밤 10시쯤이 넘어서자 그 ‘테마파크’는 일제히 불을 끄고 ‘폐장’했다. 다행히도 전문대가의 옆길로 들어서면 과거의 모습이 그나마 꽤 보존돼 있었지만, 과거 기세등등했던 동인당과 장일원은 이미 그 기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2008년 북경 올림픽 개최에 맞춰 전문대가를 대대적으로 손질한다는 소식을 흘려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현실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서울의 모습을 떠올리면, 북경의 이러한 변화가 안타까울 뿐 뭐라고 할 입장은 못 되겠다 싶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과 같이 시간의 변화는 주로 이러한 가시적인 ‘하드웨어’의 변화를 통해 인식되곤 한다. 특히 도시에서는 더 그렇다. 그래서 이러한 서사는 일반적인 도시 역사, 즉 시간에 따른 변화의 가장 전형적인 서술을 구성한다.
사진출처: 중국 전경망
작년 봄학기, 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역사학과 석·박사과정 수업으로 ‘중국당대사전문연구(中國當代史專題)’라는 수업이 개설되었다. 한국의 개념으로 보자면 ‘현대사’에 가까운 이 ‘당대사(當代史)’ 수업은 중국에서는 개설 자체가 쉽지 않은 수업인 것 같다. 청화대(淸華大)의 경우 작년 봄학기 이후로는 이 수업이 개설되지 않고 있다. 청화대에서는 이 수업뿐만 아니라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문화대혁명 ‘공식’ 역사를 가르치는 대규모 교양 강좌가 매 학기 개설되고 있었는데, 이 역시 작년 봄학기 이후로는 개설되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 중국의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유하고 있는 인식이 있다. 몇몇 민감한 시기에 대한 연구는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 그리고 그 민감한 시기는 생각보다 세분화되어 있고 생각보다 길다.
작년 봄학기, 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역사학과 석·박사과정 수업으로 ‘중국당대사전문연구(中國當代史專題)’라는 수업이 개설되었다. 한국의 개념으로 보자면 ‘현대사’에 가까운 이 ‘당대사(當代史)’ 수업은 중국에서는 개설 자체가 쉽지 않은 수업인 것 같다. 청화대(淸華大)의 경우 작년 봄학기 이후로는 이 수업이 개설되지 않고 있다. 청화대에서는 이 수업뿐만 아니라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문화대혁명 ‘공식’ 역사를 가르치는 대규모 교양 강좌가 매 학기 개설되고 있었는데, 이 역시 작년 봄학기 이후로는 개설되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 중국의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유하고 있는 인식이 있다. 몇몇 민감한 시기에 대한 연구는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 그리고 그 민감한 시기는 생각보다 세분화되어 있고 생각보다 길다.
이는 현재 중국에서 현대사를 둘러싼 갈등이 여전히 얼마나 첨예한지를 증명한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중국당대사전문연구’ 수업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러한 학계의 분위기를 접할 수 있었다. 일단 이 수업을 전담하는 교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명의 교수가 전체 한 학기를 반씩 나눠서 8주씩 수업을 맡아 하는데, 두 교수의 강의 내용은 기계적으로 시기를 나눴을 뿐 전혀 유기성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두 교수의 역사관과 입장이 너무 달랐다. 한 교수는 문화대혁명 시기의 역사를 강의했는데,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당교(中央党校, 공산당 간부 교육 기관) 교수였다. 그리고 다른 한 교수는 신중국 성립 초기의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강의했는데, 이번 강의가 본인의 인생에서 마지막 강의였던 이 퇴직교수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지팡이에 의존한 채 걸을 때도 위태위태했던 이 교수는 수업 시간마다 온전히 커피와 에너지음료, 그리고 알 수 없는 몇 알의 알약에 의지해 수업을 했는데, 그럼에도 눈에는 힘이 가득했고 강의는 열정이 넘쳤다. 그런데 이 열정이 교육과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느껴지기보다는 화염과 같은 분노의 에너지로 느껴졌다. 이 교수는 항상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이 화는 종종 중국 공산당과 중국의 현 체제, 그리고 다른 학자들을 향하곤 했다. 그의 화가 향한 학자들 중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지도교수인 왕휘(汪暉) 교수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역사학자로서 과거 중국 공산당의 토지개혁 정책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사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불만스러운 듯했다.
작년 봄은 북미 관계가 유난히 위태로운 시기였다. 중국 매체인 <환구시보(環球時報)> 사설이 며칠에 걸러 한 번씩 나올 만큼 중국에서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때 수업 중에 이 교수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갑자기 나에게 질문을 했다. “한국인들은 미조(美朝, 즉 북미) 간에 전쟁이 날 거라고 생각하는지?” 당시 북미 간의 정세에 대해 한국에서는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여론이 잠잠한 것 같아 “한국인들은 전쟁이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 교수는 “이번 기회에 미조 간에 전쟁이 나서 조선이 완전히 망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전히 잔뜩 화가 나 있는 채였다. 교수의 이 말에 학생들은 북조선(혹은 북한)을 조롱하는 말들로 한 마디씩 거들었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이 내용이 수업 내용과 전혀 관계가 없고 교수가 너무 분노에 차 있어서 더 이상 토론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그날 저녁은 생각이 너무 어지러워 거의 두 시간은 혼자 교정을 배회했던 것 같다. 도대체 전쟁이 나서 한 사회가 망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교수가 수업 시간에 해도 되는 것인지, 사회주의 체제를 같이 고수하고 있는 북한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북중 간의 관계는 아직도 ‘동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지, 현대사 연구에 대한 그 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청화대 강단에 선 이 교수는 어쩌면 이리도 ‘사상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지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불가사의할 뿐이었다. 사회주의 중국의 주권자인 당대 중국의 인민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중국의 ‘소프트웨어’에는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유학 생활을 하면서 좁은 생활범위에서 한정된 경험만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나로서는 중국에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또 어떤 거시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러 경로를 통해 좁은 시야를 넓혀 일련의 가설을 갖고 부족한 정보를 메워 약간의 짐작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으로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중국 농촌에서 서양 종교의 전파 현황>(《西方宗敎在中國農村的傳播現狀》,董磊明、楊華/華中科技大學中國鄕村治理硏究中心) 1) 이라는 연구보고서는 매우 큰 시사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근대적 이성과 전근대적 종교’라는 어떤 믿음 체계, 그리고 근대 정치의 원칙으로 이야기되곤 하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사실은 서구 기독교 세계의 원칙일 뿐이지만), 종교와 사상의 명확한 구분,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근대 인간의 출현 등과 같은 담론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고대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신화와 종교(고대 종교와 현대 종교를 막론하고) 그리고 사상, 특히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무장해 종교를 (전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대체하고자 했던 근현대 사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특히 종교는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한 면을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중국 농촌에서 서양 종교의 전파 현황> 이 보고서의 내용은 놀랍다.
중국에는 국가가 승인한 5대 종교가 있다. 불교, 도교,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교가 그것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북방과 남방의 종교 상황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국적으로 개신교가 종교 인구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5대 종교 중에서 적지 않은 지역에서 개신교도가 전체 종교 인구의 9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북방에서 개신교의 확장이 뚜렷한데 북방 농촌에서는 전인구의 10~15%를 개신교도, 50% 정도를 전통 민간 종교, 그리고 나머지는 무교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비록 전통 민간 종교의 비중이 여전히 높긴 하지만, 실제로 종교 방면에서는 개신교가 뚜렷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급속하게 성장하는 추세에 있다고 한다. 전국적인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개신교도는 중국 총인구의 10~15% 정도를 차지하는데 미성년자를 포함하면 15% 이상이 되고, 개신교도와 개신교에 긍정적인 인구를 합하면 대략 1억~1억5천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2) 이러한 통계가 추정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중국의 개신교에서 큰 축을 차지하고 있는 가정교회는 정부에 등록하지 않거나 정부에서 승인하지 않은 ‘지하교회’에 속하므로 정확한 통계를 내기가 힘들다. 그래도 이 보고서는 개신교 중에서 중국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삼자(三自)교회의 인구를 2천5백만~3천만 명 정도, 가정교회의 인구를 6천만~7천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동방번개파(東方閃電)나 제자파(三贖基督) 등과 같은 소위 ‘기독교 이단’도 놀랄만큼 빠르게 확장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중국 사람들, 특히 중국의 농촌 사람들은 왜 이렇게 개신교에 빠져들고 있을까. 이 보고서는 그 이유를 개혁개방 이후 1980년대부터 시작된 중국 농촌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서 찾고 있고, 그 변화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사회 구조의 급격한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가치관의 신속한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들로 농촌의 사회 구조는 매우 불안정해졌고 가치관에도 심각한 혼란이 발생했다. 농민들 말로 하면 “화가 많이 난다.”고 표현된다. 사회 구조의 급격한 변화는 농촌 사회를 격렬한 경쟁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도태되는 사람들이 다수 출현했는데, 농촌 공동체는 이미 이들을 돌볼 수 없게 되었고 국가는 오히려 이러한 통치의 영역에서 후퇴해버렸다. 개혁개방 전 국가는 사회의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적 영역까지 관리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지만, 개혁개방 후 국가는 대부분의 사회 관리와 건설 부문을 지역의 농촌 사회에 넘겨버렸다. 사적 영역도 마찬가지였다.
농촌 사회 스스로의 역량으로 향촌 사회 관리와 건설의 임무를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가의 급속한 후퇴는 농촌 사회에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모두에서 통치의 공백을 초래했고, 사람들은 이러한 공백 속에서 새로운 가치 체계, 즉 사회적 체면, 영예, 지위, 권력 등에 대한 새로운 평가 체계를 구축하지 못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기존의 사회 구조에서 더 쉽게 이탈할 수 있게 되었고 혹은 이탈되었고, 개신교는 국가가 사라진 영역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보충함으로써 급속하게 확산할 수 있었다. 이 보고서는 개신교인은 사회에서 이탈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단호한 이탈자로 본다. 이는 주로 북방 지역의 서사이다. 보고서는 남방과 북방을 다소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남방은 전통적인 사회 구조와 문화를 일정 정도 유지하고 있으므로 사회 변화에 대해서도 일정 정도 자립적인 사회 보호 체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개신교와 같은 ‘외래 종교’가 비집고 들어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방 역시 전통적인 사회 구조와 문화는 이미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본다.
사진출처: 중국 시계망
중국 농촌의 이러한 상황은 또한 현대 중국의 역사를 일정 정도 계승하고 있기도 하다. 혁명과 과학 담론으로 무장한 신중국 정부는 농촌 건설 운동을 통해 농촌을 철저하게 개조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농촌의 전통 신앙 체계는 “4대 구체제(四舊)” 중의 하나로 공격받았고 사람들은 ‘봉건미신’이라는 담론을 받아들여 전통 신앙 체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개혁개방 후 혁명과 과학(적 사상)은 점차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혁명과 과학이 물러난 자리에 종교가 새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종교는 한 손에는 돈,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십자가를 쥐고 있는 모양새다. ‘빵과 장미(사상이든 종교든)’는 언제나 진리다.
아주 제한된 경험만을 할 수 있을 뿐인 유학생의 눈에도 사회주의 중국은 뭐라 단정할 수 없을 만큼 모순적이고 복잡한 것들로 가득 차 보인다.
고도(古都)에서 과거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극적인 외관상의 변화, 사회주의 이념 및 역사와 화합하기 어려워 보이는 비사회주의적 인민들, 이성(혁명과 과학) 대신 종교를 택하고 있는 21세기의 사람들, 어느 것 하나도 규범과 법칙적 인식으로는 이해하기 곤란함을 느낀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한 네덜란드인 지인은 나에게 “왜 한국인들은 행복하냐는 질문에 그렇게 집착하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벌써 수년 전의 일이다. 당시에는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곱씹어 생각해보니 삶에 대한 공허함이 그러한 질문에 매달리게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행복에 대한 질문과 집착 그리고 과시, 높은 자살률 등은 한국 사회 역시 가치관의 공백과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중국인들도 “행복하냐”는 질문의 늪에 빠지게 될까. 나 자신은 그 공허함을 무엇으로 메우면 좋을지. 그나마 이것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륙까지 뻗어가 실은 우리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발견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을지.
  • (1) https://mp.weixin.qq.com/s/Eg9fs4QAChkNq-ahJjFZKQ 이곳에서 <서양 종교는 중국 농촌에서 어느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가?>(《西方宗教在中国农村发展到何种程度?》)라는 제목으로 원문에서 약간 편집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 (2) 참고로 2017년 12월 28일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종교인구는 총인구의 46.6%로, 개신교 인구는 20.3%, 불교 인구는 19.6%, 천주교 인구는 6.4% 이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2/28/0200000000AKR20171228175500005.HTML?input=1179m

글 ㅣ 박석진 (청화대淸華大 역사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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