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과 동아시아 시민

동아시아와 시민
20세기 후반 냉전체제가 종언을 고한 뒤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는 주체로서 ‘인민’이나 ‘민중’과 같은 계급적 개념은 위상이 약화되고, 그 대신 최근 한국사회에서 화제가 된 ‘촛불시민혁명’이란 말처럼 ‘시민’이라는 개념이 주목을 끌고 있다. 물론 이 개념이 지금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에 대두되었다. 하지만 시민 또는 시민사회라는 말이 꽃을 피운 것은 구미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시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20세기 후반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21세기는 NGO의 시대’라는 표현처럼 이제 국가(정부)를 대신해서 시민사회에 한층 주목하게 되었다. 그동안 정부(국가)와 시장이 사회를 구성하는 두 개의 중심적인 영역이었던 데서 나아가 시민사회가 또 하나의 영역으로서 그 역할과 중요성이 커졌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시민사회 영역 역시 근대화와 함께 발전해왔다. 이것은 동아시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근대 100여 년간 동아시아 각국에서 시민과 시민사회는 급속히 성장했다. 특히 한국의 시민사회는 짧은 시간 빠르게 성장해왔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활동에 비해서 이론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70년대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시민과 시민운동을 성장시켰고, 그런 점에서 한국의 시민 담론과 실천은 강한 정치성을 띠었다. 이제는 그것이 일상의 삶에서 광범위하게 구현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일로 나아가고, 또 ‘세계시민’이라는 용어처럼 이제는 세계적 교류와 연대의 중요한 주체로서 시민이 주목받고 있다. 이에 국내의 다양한 시민과 시민사회 관련 활동들을 이론적으로 점검하고 학문적으로 그 비전을 제시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시민과 시민사회에 대한 검토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2016년 촛불시위 장면 <사진출처: 네이버사전>
이처럼 시민(사회)를 얘기하면서 또 동아시아를 소환하는 이유는 현재 동아시아 지역의 현안들 때문이다. 이것은 근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빚어진 역사인식, 영토분쟁, 정치 논쟁 심지어 혐한, 혐중, 혐일과 같은 표현처럼 감정적 대립에 이르기까지 그 몰이해와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는 상황과 관련된다. 한반도 분단, 역사해석과 영토 문제, 환경문제 등은 정치 외교적 문제이지만, 그 실제적 해법은 결국 동아시아 시민들의 상호 이해와 공동의 노력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원래 시민이란 국가의 주도에서 벗어나 사회 영역에서 스스로 주체적인 행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전통적으로 국가가 사회를 압도했으며, 사회 각 부문의 활동이 국가주도 하에 놓여 있었다. 이것이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와 시민사회 형성을 더디게 한 원인이었다. 동아시아에서 근대화 백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민국가의 수립이라는 근대의 정치적 의제가 중요시되면서 ‘국민’의 육성이 강조되었던 것, 그리고 사회주의 중국 역시 혁명의
주체로서 ‘인민’을 강조해왔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민’이든 ‘인민’이든 국가(정부)에 의해 양성되는 수동적인 개념이 중요시되었다면, 이제 21세기는 주체적인 개인이 자유롭게 소통하면서 집단적인 의견을 표시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한 국가에 속하지만 그 경계를 뛰어넘는 동아시아의 성숙한 시민이 중요하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시민’이라고 명명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근대 초기 동아시아의 여러 지식인들에 의해서 ‘주체적인 개인’은 궁극적인 목표로서 제기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동아시아의 시민 형성은 근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아Q와 동아시아 시민
일반적으로 시민은 공동체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로 서로 관계 맺으며, 공동의 문제를 함께 숙의하고 해결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단지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가족, 동창, 고향 친구 등 좁은 인연에만 갇혀 있거나 만인의 자유와 평등에 기초하지 않은 국가적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은 결코 시민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시민은 자유를 사랑하고 타인의 존엄과 자유를 존중하며, 평등한 관계 속에서 타인과 연합하고 그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의 가치와 행동 방안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시민이란 개념은 자유로운 시민, 연대하는 시민, 참여하는 시민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자유, 연대, 참여는 바로 시민의 가치이자 행동 규범이다. 1)
이렇게 시민을 규정하고 보면 이 시민과 정반대에 서있는 인물이 바로 루쉰이 묘사한 ‘아Q’임을 알 수 있다. 루쉰은 바로 아Q라는 반면 인물을 통해 이러한 시민의 가치를 드러낸 것이다. 루쉰은 서구의 문화사를 정리하면서 정신과 개인을 그 핵심으로 파악했고, 독립된 의지와 인식을 갖춘 개인의 출현을 중국에서 기대했다. 이것은 서구의 시민을 대표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서구의 경우 이러한 시민이 탄생하여 시민사회가 형성되기까지 상당히 긴 역사가 필요했던 것에 비해 중국은 그렇지 못했다. 루쉰의 고민은 여기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시민은 구체적인 역사 과정을 통해, 오랜 관행과 전통을 뚫고, 시대적 환경과 생태학적 조건을 타고 형성되는 역사적 존재라고 정의한 것처럼2),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시민의 탄생은 근대 100여 년의 과정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고, 지금도 이것은 진행 중이다.
중국 근대문학가 루쉰 <사진출처: 네이버사전>
루쉰이 희망했던 주체적인 개인은 그의 일생 추구했던 과제이고, 이를 위해 그는 평생을 몸부림쳤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의 결과물이 바로 그의 문장이었다. 그는 기약 없는 이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이를 위해 그의 행한 실천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시민(주체적 개인)의 탄생과 성장을 방해하는 제반 요소들을 파악해서 전면화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속적으로 외부의 피를 수혈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과거를 재해석하면서 중국의 현실을 예리하게 관찰하였다. 이것은 첫 번째의 작업과 연장선상에 있었다.
현재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시민운동은 서구와는 달리 루쉰이 일생 추구한 ‘주체적 개인’의 탄생과 같은 인간학 즉 인문학적 바탕에서 다시 재구해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주체적인 개인이란 과제가 아직 동아시아에서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시민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시민과 시민사회의 성장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필요성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이전에 인간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 지역은 근대화를 급속하게 진행해온 탓에 사회의 많은 분야에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상적으로 아직 많은 혼란과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이것은 시민사회의 영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민사회가 성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바로 이것이 동아시아의 상생과 협력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동아시아의 시민사회를 더욱 성장시키고 또 성숙된 동아시아 시민을 양성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따라서 미래의 성숙한 시민을 길러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 더욱 절실하다. 이것은 결국 시민(사회)에 대한 이론적 정립 역시 동아시아 근대성에 대한 탐문과 함께 전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시민(사회)에 대한 학문적 정립을 위해서 다시 동아시아를 소환하는 것 역시 기존의 동아시아론과 멀지 않은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면에서다. 첫째, 시민학 정립을 위한 인문학적 토대로서 동아시아다. 자유와 평등이란 서구 근대문명의 가치를 구현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의 실현은 결국 성숙된 시민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이러한 시민을 육성하는 일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서구 근대의 인문학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동시에 동아시아의 전통 속에 내장된 다양한 공동체 형성과 인간적인 유대의 경험을 복원하고 이를 민주적 가치와 융화시켜내는 이론적 작업이 필요하다. 둘째, 근대 이후 전쟁과 식민지 등 굴곡의 역사를 공유한 동아시아에서 상호간의 오해를 불식하고 진정한 소통과 평화를 추구하는 실천적 과제로서 동아시아다. 다시 말해 역사인식을 비롯해 엄중한 동아시아 지역의 상호 오해와 차별은 결국 동아시아의 성숙된 시민과 시민운동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질곡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근대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의 사상 및 교류 그리고 연대운동 등을 발굴해내고, 이를 적극적으로 사상적 자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자원의 한 가운데 루쉰이 있다.
  • 1) 신진욱, 『시민』, 책세상, 2008, 15-16쪽
  • 2) 박명규, 「21세기 주체 형성을 위한 신기획 : 시민 되기와 시민 만들기」, 『지식의 지평』 20호, 2016년 5월

글 ㅣ 동아대 중국일본학부 중국학전공 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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